산수화 아카이브


Exhibition ◐

2024 ~ 2023 2022 2020-2021

Workshop

2024 ~ 2018-2023
산수화에서 시작한 공간이지만 차에 집중하며, 차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찾아갑니다. 산수화의 여러 어둡고 밝은 공간들을 낮과 밤, 낮밤으로 부르며, 두 단어를 함께 담아 ‘밪’이라는 이름으로 만들고 ◐은 이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기호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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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mporary 진주요

Contemporary 진주요

點은 통제를 線은 연결로 소통을 한다

진주요 홍우경 작가는 자신을 ‘전통도공’이라고 종종 언급한다. 오늘에 대한 고민과 내일에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큼에도 왜 그는 스스로를 ‘전통도공’이라고 할까… 전통과 현재의 시간은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조화로운 공존으로 본다. 과거는 지나간 세월의 단절이 아닌 연결을 통해 오늘로 이어지는 시간이다. 그렇게 전통도공은 과거의 향유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과거에 오늘을 덧붙이며 내일에 전해야 한다.

“點은 통제를 線은 연결로 소통을 한다”

한국의 백토는 큰 작업을 하면 주저 앉거나 무너지기 일쑤였다. 달항아리는 이러한 단점을 이겨내기 위해 두 개의 반원을 차낸 후, 건조시켰다가 접합한 것이다. 달항아리의 미학과 철학은 어찌 보면 한계에 대한 표출이자, 극복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서를 담은 달항아리의 미학과 철학을 계승하여 세계와 소통을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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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산방 30주년

고연산방 30주년

한국 재래종 고재나무로 다도구를 만드는 고연산방의 30주년 기념전시입니다. 다양한 나무의 결과 섬세하게 작업한 다하와 다루, 개반 등을 한 자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30여년간의 디자인들과 새로운 작업도 함께 전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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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Antique, No Life

No Antique, No Life

Recombination

의식을 갖고 입는 옷은 어느 정도 그 사람을 대변한다. 조인성 작가의 스타일이 그렇다. 좋게 말해 낡고, 안 좋게 말해 너저분하다. 굳이 정의하자면 80-90년대에 등장한 ‘그런지 룩’이 이에 부합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지저분함과는 거리가 있다. 단지 보기에 자유분방하고 허름할 뿐이지 정갈하며 깔끔하다. 특히, 신발은 병적일 정도로 깨끗하다. 그래서 묘하게 언밸런스 하면서도 균형 잡힌 이질감이 있다.

‘그런지 룩’의 대두는 기존의 세속과 격리한 히피 문화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회로 들어온 변형된 타입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히피 문화가 그러했듯, 격식과 전통 그리고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은 고스란히 옷으로 표출된다. ‘그런지 룩’의 표방은 기존에 대한 저항적 의식이 반영된 패션이라 언뜻 젊음이 쉽게 연상되지만, 조인성 작가는 오히려 ‘그런지 룩’이 저항하고자 하는 나이에 가깝다. 그래서 그 패션이 더 이질감 나게 돋보인다.

그런 그는 골동(骨董)을 사모한다. 그리고 사모의 대상과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한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원했던 골동품을 손에 넣었는데 땟물이 가득하여 씻겨 내기 위해 목욕탕 속에 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함께 말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골동품과 교감하며 보냈다는 다소 기이하고도 기행적인 일화지만 그가 골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낡은 패션은 공교롭게도 골동을 연상시키며, ‘그런지 룩’이 내포하는 저항의식은 골동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한계에 새로운 대안으로 드러낸다.

오래된 ‘과거의 골동’ 그리고 다음을 위한 ‘미래의 골동’을 이야기해줄 11번째 B.A.A.T. ◐의 작가, 조인성의 이야기이다.


Chapter I. 골동을 사모한 조인성

◐. 골동품(骨董品)이란?

부모님이 갖고 계신 20-30년된 물건은 단순히 오래됐다는 느낌이지만, 증조때부터 내려오는 물건은 왠지 경외감과 동시에 몹시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그러한 물건을 우리는 오래된 물건이라 하지 않고 별도로 골동품(骨董品)이라고 부른다. 증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4세대를 걸치게 되는데, 그 시간이 얼추 100년쯤 된다. 한국 관세법에서 규정하는 골동품의 정의(定義)와도 일치한다.

고동품, 고완품, 고미술품, 엔틱 등 다양한 표현으로 불리우나, 가장 흔히 쓰이는 표현은 ‘골동품(骨董品)’이다. 매우 오래된 물건의 대명사로 쓰이는 골동품의 어원은 몇 가지 설이 있다. 옛 그릇을 의미하는 홀동(匢董)이 잘못 전해져 와전됐다는 설과 또 다른 설은 송(宋)나라 때, 뼈를 오랜 시간 고아 만든 골동갱(骨董羹)이라는 요리가 시간을 걸쳐 ‘오랫동안 애완된 고물(古物)’에 비유되어 일컬어졌다는 설이다. 오늘날 골동의 정의는 공식적으로 100년 이상 된 물건을 지칭하지만 그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제하면 사실상 그저 오래된 중고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중고품과 골동품은 일맥 상통하지만 오래된 시간과 역사적 의미, 그리고 희소성이 가미되면서 가치의 격차는 벌어진다. 현대에 와서 비슷한 느낌의 ‘빈티지 (Vintage)’라는 장르가 있지만 대체로 대량 생산되는 물건으로서의 그 역사가 짧다. 오랜 논쟁 끝에 일반화된 정의가 100년을 넘는 물건은 ‘엔틱 (Antique)’, 그리고 40-100년 이내의 물건을 ‘빈티지’라고 규정하니 시간의 의미부여가 큰 셈이다.

◐. 조인성 그리고 오랜 친구

조인성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골동품과 골동시장에 친숙한 환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골동은 조인성 작가에게 일상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이었다. 조용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어린 그에게 시간의 ‘때’와 그 흔적이 쌓여 만들어진 먼지의 ‘때’가 버무려진 골동품은 좋은 친구였다.

오늘날까지도 그 인연은 이어지며, 심지어 골동품을 다루는 일이 직업이 되었다. 골동품으로 시작한 그의 첫 행보는 ‘가이다시 (賣出:かいだし)’였다. 오늘날에도 골동시장에서 흔히 쓰이는 이 표현은 주로 골동품을 사서 상인에게 공급하거나 직거래하는 고객들에게 납품하는 골동상을 뜻한다. 그러나 단순한 매매상(賣買商)이 아닌 고객의 니즈에 부합되는 물건을 찾고, 그 골동품을 평가하는 안목 및 구매력 그리고 납품의 능력을 요하는 매우 전문적인 직업이다. 적합한 시장을 찾아야 하며,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하고 무엇보다 고객에 알맞은 물건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그의 시장은 작은 곳에서부터 큰 곳까지, 공적인 루트에서 매우 사적인 라인까지 그리고 전국에서 해외까지 고루 넓혀졌다고 한다.

무엇으로 하여금 골동품에 사로 잡히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어린 시절에 좋은 친구가 되어준 배경에 있다. 즉, 골동품의 매력은 오랜 친구가 그러하듯, 그 존재로서 의미와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눌까… 조인성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골동품의 기물을 통해 그 시대를 읽고, 그 배경을 이해하고, 그 시대에 필요했던 쓰임을 생각하고, 만든 이를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오늘날과 달랐던 그 시대의 사람들과 교감하게 된다고 한다. 그를 통해 자연스레 ‘다름’을 포용하게 된다고 한다. 골동품은 그러한 과거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매개체인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대화를 통해 조인성 작가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 골동품, 접근의 어려움

그가 사모하던 골동품은 그에게 안락함과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조인성 작가는, 개인적으로 느꼈던 골동품에 대한 기쁨과 매력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날 골동품은 한정된 수량의 한계로 소수의 소유물로 전락해, 좋은 골동품은 그 자취가 거의 감춰져 버렸다고 한다.

골동품은 그 태생부터 수적 한계를 지닌다. 일정 시기에 생산되고 더 이상 생산되지 않기에 희소성은 있지만, 파손되거나 유실되면 부족해지는 것을 넘어서 소멸되기 때문이다. 골동품이 갖는 생태적 숙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래 한국 역사에서 외적인 이유로 더욱 감축된 일말의 족적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그 가치를 알았던 일본인들에 의해 침탈당하고 분실된 시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시기이다. 그리고 70-80년대의 고속성장을 통해 골동품 또한 활발히 유통되어 해외로 유출된 시기 등이다. 한국의 사회는 이렇게 1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된 일말의 사건들로 인해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기며 급변하게 전환되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전통에 대한 역사와 기술, 그리고 가치를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잃거나 잊었다. 그나마 유서 깊고 희소가치가 있던 골동품 또한 시장논리에 의해 소수의 사람들에게 독식되어 자취가 감추어 졌거나 박물관에 박제되어 버렸다. 그래서 100년이 넘는 골동품이 비교적 흔한 유럽과 다르게 침탈과 유실이 많았던 역사로 인해 골동품이 드물어져 그 가치가 지나치게 비대해졌다. 골동품은 그렇게 생활속에서 생활 밖으로 멀어졌다.


Chapter II. 시간의 조합자, 조인성

◐. Recombination의 배경

골동품은 고갈되고, 자취를 감추고, 무엇보다 고가의 물품이다 보니, 너무 소중하게 다루어져 원래가 갖고 있던 기(器)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박제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을 조인성 작가는 안타깝게 생각하던 즈음, 현실적인 배경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아무리 박제하고 소중히 다룬다 한들, 시간이 경과되고 관리를 소홀히 하다 보면 파손은 불가피 하다. 그러면 골동품도 수리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쓰임새가 애매하거나, 소재들이 분산되면 사실상 골동품이라 하더라도 그저 오래된 고목이나 소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조인성 작가는 그렇게 쓰임도 잃고, 적합한 용도에 부합되지도 않고, 방치된 소재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조합을 통해서 말이다.

◐. Recombination이란?

골동품 업계 혹은 서양의 고가구를 취급하는 엔틱(Antique) 업계에서 오랫동안 쓰이는 표현이 있다. Reproduction (복제)이다. 70-80년대, 한강의 기적이라 일컬어진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은 서양문화가 붐을 이루었다. ‘서양문화가 선진’이라는 인식과 맞물려 엔틱 느낌의 고가구들이 고풍스러운 부(富)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엔틱 고가구는 고사하고 해외의 흔한 상품조차 쉽게 유입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에, 손재주 좋은 장인들이 엔틱 느낌이 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 Reproduction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80-90년대 복제된 서양의 고가구들이 초호황을 누리면서 한국의 골동품 또한, 함께 복제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카피가 성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조인성 작가는 골동품에서 품어 나오는 ‘원본의 아우라’를 사모하였다. 그리고 그 아우라는 ‘다른 시대의 시간’과 교우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했다. 오늘날 대량 생산과 정교한 복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골동품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그 시대가 갖고 있는 기술과 방식으로 만들어진 단 하나의 제품이 시간의 경과로 인해 형성되는 아우라였다. 그 아우라의 개념은 ‘원본과 복제의 차이란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논쟁을 20세기 초에 이미,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정의하였다.

그런 아우라를 조인성 작가는 최대한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파손된 골동품의 소재와 쓰임이 애매한 골동품을 ‘새로운 조합으로 재창조 (Recombination)’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박제되고 자취를 감추게 된 골동계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옛 것을 품은 새로움, Recombination”

◐. Recombination은 기다림

조인성 작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표현들이 있다. ‘적당히, 알맞게, 적합한, 적재적소’와 같이 ‘알맞은 타이밍’이 도드라지는 표현이다. 아마도 Recombination에 있어서 가장 요구되는 능력 중에 하나가 바로 소재와 소재의 조건이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기 위한 기다림이라 그렇지 않을까 싶다. 자연스럽게 들어맞는 조합을 위해서는 기다림이 수반되어야 적절한 매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인성 작가는 어떻게 보면 소외되는 골동품과 소재를 ‘쓸모없음’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가치를 믿고 기다림으로써 비로소 알맞는 옷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소재로 계획하던 대로 만들 수 있지만, Recombination은 골동품과 오래된 소재의 한정된 요소에서 새롭게 조합해야 하기에 그 소재들이 등장하기까지 기다림은 불가피하다. 조급하게 만들면 어설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합한 소재와 알맞은 타이밍을 알아야 ‘기품 있는 아우라’를 풍길 수 있다.

이번 ◐ B.A.A.T.에서 전시되는 작품 중, ‘직사각형 패물함’과 ‘문갑형 서안’의 손잡이는 삼끈으로 제작하였는데 적재적소의 좋은 삼끈이 나왔기에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좋은 소재 덕분에 삼끈의 손잡이라는 아이디어도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알맞음을 위한 적절한 기다림’이 창조의 원천이 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인성 작가는 알맞은 맞춤을 위한 조합자(調合者)인 셈이다.


Chapter III. 다음의 행보, 조인성

◐. Recombination의 생활화

조인성 작가는 골동상으로써 골동품에서 느낀 좋은 감정을 나누고자 하였으나 골동품계가 안고 있는 생태적 한계와 환경적 요인에 부딪혔다. 그것이 Recombination을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했던 이유였다. 그러나 막연하게 골동품의 형태를 답습하면 여전히 박제된 골동품으로써 살아 있는 기(器)의 기능을 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Recombination된 작품이 실제로 쓰이기 위해서 시대의 환경과 쓰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생활은 좌식(坐式)에서 입식(立式)으로, 공간은 개방에서 밀폐로, 구조는 연결에서 단절로, 크기는 넓음에서 좁음으로, 쓰임새는 한 가지(單)에서 다양하게 바뀌어진 현대에 맞아야 했다. 그래야 멀리 박제하여 보지 않고 가까이하여 사용할 수 있는 기(器)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단상은 높이고, 제품의 크기는 일반적인 아파트나 집 구조에 맞게 조금 작게, 용도는 가장 흔한 일반적인 물건들의 평균 크기와 다용도에 맞는 사이즈로, 복잡한 무늬보다는 장식을 줄이고 모던하게 제작한다. 그렇게 박제된 박물관의 골동품은 집안으로 들어와 우리들이 사용함으로써 그 가치가 온전히 체감될 수 있다. 전통성은 가져가되 시대가 원하는 쓰임으로. 그것이 ‘골동품의 다음’인 ‘살아 있는 골동품’이라고 보았다.

“골동품은 사용되어야 산다”

◐. 골동품은 보고 만져라

Recombination은 골동품의 다음을 위한 대안이지만 골동품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사실 Recombination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골동품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제안하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골동품은 진입부터 역사와 지식이 마치 거대한 벽과 같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 때문에 대부분 고가(高價)일 것 같지만 의외로 저렴한 골동품도 많다. 그래서 조인성 작가는 우선 구입 가능한 금액부터 시작하여 자주 보고 만져보라는 거다. 만지고, 생각하고, 공상하고, 이해하려 하면 자연히 그 시대와 ‘만든 이’에 공감할 수 있는 씨앗이 싹틀 수 있다고 한다. 거기서부터 골동품에 대한 애정은 시작된다. 다만 흥미요소를 어디서부터 찾을지는 각자의 몫이다. 조인성 작가의 경우 의외로 작은 부속적인 요소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반닫이의 장석[1], 수납장의 경첩[2], 그리고 소반의 풍혈[3] 등 그 기물을 꾸며주는 장식과 기능 요소가 매우 흥미롭고 궁금한 요소였다. 어떤 장석의 형태는 박쥐인지 원숭인지 애매하고, 때로는 박쥐인데 원숭이 얼굴을 하고 있거나, 윙크를 하고 있는 모습 등을 보면서 이끌림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게 재미요소가 하나둘씩 쌓여가며 골동품의 경험도 축적되어갔고 그 궁금증은 자연히 탐구의 길이 되었다고 한다.


“No Antique, No Life”

골동품을 통해 과거와 대화를 하고 골동품을 통해 미래의 대안을 이야기하는 중심에는, ‘좋은 것을 보았을 때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 일전에 조인성 작가에게 “골동상을 하면서도 Recombination에 힘을 쏟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했던 대답이 “No Antique, No Life”였다. 언뜻, 전통적인 골동을 다루는 그에게서 나온 영어가 낯설었다. 그러나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전통에만 고착하지 않고 시대에 맞는 새로움을 제시하기에 이질감 나는 그 표현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러면서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즐기고 만족감을 느꼈던 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었을 뿐… 골동품이란 게, 꼭 돈이 있고, 여유가 있고, 많이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 안목에서부터 시작하고 보아야 한다. 안목이라는 것도 기르는 거다. 그러니 각자의 수준에서 좋은 것을 보면 된다”

골동품이 단순히 ‘오래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면, 조인성 작가를 통해 ‘다음의 골동품’이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하다.


[1] 장석 (裝錫): 목가구나 건축물을 제작할 때, 기능은 보강하면서 장식적인 효과까지 얻기 위해 사용된 금속 장식을 총칭하여 ‘장석’이라 한다. 기능적 요소뿐 아니라 아름답게 치장하여 꾸밈새로 쓰이는 모든 것을 통틀어 일컫는다. (참조: 문화재청 웹사이트 Link)

[2] 경첩: 여닫이문을 달 때, 문틀과 문짝 양쪽을 고정하여 개폐할 수 있는 철물을 뜻한다.

[3] 풍혈 (風穴): 주로 목공예품의 가장자리에 구멍을 뚫어 모양을 만드는 꾸밈새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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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보와 色

민보와 色

말(言)은 언저리까지, 정점은 감(感)이 찾는다

작가님을 인터뷰하기에 앞서, 인터뷰가 마무리되면 반드시 식사를 하고 가야 한다는 언급, 아니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긴 인터뷰가 마무리되고 기어이 작가님이 손수 차려 주신 음식을 대접받게 되었다. 토속적인 갱죽과 집 앞에서 키운 방아잎 (배초향)으로 무친 나물, 그리고 직접 담근 식혜도 있었다. ‘집밥 같은 외식’이 아닌 실로 오랜만에 ‘참 집밥’이었다. 식사를 맛있게 마치고, 설거지를 하시는 작가님의 뒷모습을 보니 ‘왜 작가님은 꼭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색(色)에 매료되어 오롯이 자연의 식물로만 시현하는 염색가이자 화가, 김정화 작가.

염색의 인연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생소한 전통 조각보, 민보.

B.A.A.T. ◐에서 물들일 10번째 작가. 그녀와 그녀의 대접(待接). 그리고 민보에 관한 이야기다.


◐. 작가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가?

한국이 아직 현대화되기 전의 사회상을 그려보면 흔히들 떠오르는 표상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누나나 언니가 동생을 업고 다니는 이미지다. ‘맏이’로서 나도 그랬다. 그러나 도리어 내가 업혔다. 업혀 다닐 만큼 허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래의 아이들처럼 밖에서 뛰어 놀기보다, 앉아서 밖을 관찰할 수밖에 없던 아이였다. 그렇게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을 관찰하고, 정경을 관찰하고, 자연을 관찰했다.

그런 관찰 속에서 미묘하게 분별되기 시작한 게 바로 색(色)이었다. 똑같은 대상이라도 내가 본 상품과 그림의 색. 그리고 실제 자연의 색은 달랐다. 이를 통해 나만의 색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대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나 중 3때 가세가 기울면서 여느 어려운 가정이 그러 하듯, 밑에 있는 동생들과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 나의 삶보다 컸다.

◐. 그런 상황에서는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우선 시 되었을 것 같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친구의 추천으로 얼떨결에 본 시험이 그대로 나의 직업이 되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문명화된 시기가 아니었기에 농촌을 방문하며 생활개선을 도모하는 일종의 계몽적인 일이었다. ‘생활지도사’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농촌진흥청 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공무원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거창한 이름이지만 그 호칭에 걸맞게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 또한 컸다. 당시 내 나이가 20대 초, 중반이었음에도, 훨씬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께서 순박하게 ‘지도사님, 선생님’라 부르며, 함께 해 주실 때 마다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되뇌었다. 그래도 생활지도사라는 직업 덕분에 27세까지 일과 방송통신대를 병행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27세라는 나이는 그때의 나에게, 막연한 분기점이자 내 일을 하겠다는 상징적인 나이였다. 그러나 막상 27세가 되어 보니 남동생 셋과 집안을 일으키고 내게 남은 것은 한 학기 등록금 밖에 되지 않았다. 내 일을 하기에는 여전히 막막했다.

◐. 결국은 작가의 길로 가셨다. 그러나 삶에서 몇 가지 기점이 있던 것으로 안다. 그것은 무엇인가?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잘 한 3가지가 있다. 이혼, 결혼, 사표다. 이혼이 존재하려면 결혼이 있어야 한다 (웃음).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극단은 사실 나에게는 하나로 엮여 있는 이야기다. 결혼은 나에게 아이를 갖게 해주었다.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내 안에만 갇혀 있는 나였을 거다. 그러나 아이를 통해 내가 도구가 되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나를 넘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을 각인해주었다. 그것이 결혼의 의미였다. 그리고 이혼은 사회의 내가 아닌, 김정화의 나를 알게 해준 시간이었다. 갇힌 내가 아닌, 스스로 내 안으로 걸어 들어간 시간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오래 즐길 수 있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 나를 대면하며 면면히 질문하고, 생각하고, 답을 찾아가는 나와 함께한 시간이 이혼이었다.

마지막으로, 현실에서 살고자 한 나와 하고 싶을 일을 간절히 바라는 나와 아르렁거리던 긴 시간을 끊어준 사표다. 염색일에 매진하고 싶은 욕구를 현실과 어설프게 타협한 대가로 불만과 불평을 달았었다. 이것을 끊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불만과 불평이 나를 오랫동안 물들였을 거다.

“때로는 사회의 끝이 인생의 시작이 될 수 있다”

◐. 작가인 지금과 비교하면 공무원 생활은 다소 낯설다. 이 경험이 작가님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공무원 생활이 남긴 가장 큰 자산은 ‘결국은 할 수 있다’는 DNA를 나에게 심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공무원 생활보다 그 과정에서 맞닥트린 나의 행동과 처신이었다.

처음 공무원 시험을 보았을 때, 7급 공무원 시험을 보았을 때, 그리고 잠시 8년 동안의 공백 기간을 걸쳐 다시 공무원 시험을 보았을 때…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게 ‘하면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과 결과를 몸에 심어주었다. 나만의 DNA다.

◐. 생활지도사를 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였겠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옛날 농촌에는 흔히 좁고 작은 개울이나 도랑 같은 것이 있었다. 문명화라는 이름 아래 이 도랑이 시멘트화 되면서, 모습만 바뀐 게 아니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들이 많다. 경주 지방 일대의 도랑에서 흔하디 흔한 ‘청두'라는 식물이 그렇다. 어르신들이 종종 이 식물에 대해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이 식물로 염색을 하면 푸른색을 띈 가지색이지만 햇빛에 반사되면 오히려 묘한 붉은색을 띠어서 오묘했다고.

그때부터 이 식물을 구하고 싶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청두 식물을 발견하면 100만원을 드리겠다고 상금도 걸어보았다. 그러나 끝끝내 찾지 못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생활 지도사 경험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기억이다 (웃음).

◐. 염색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이혼을 하고 아이와 함께 고향의 어머니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세상의 모든 짐에 짓눌려 있던 시기였다. 아무리 세상이 편해진 오늘날도, 이혼이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닌데 80년대의 시대상은 내용과 상관없이 이혼이라는 낙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모질고 가혹했다. 그러니 지치고 혹독한 시선에 ‘상처받은 엄마’라는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품에 가라앉으며 잠들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했고, 좋아하는 걸까. 삶을 꾸리기에 급급했던 내 삶의 방향이 나를 가리키며 지난 날의 여정을 돌이켜 볼 수 있었다.

문득 아주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나의 가족과 집을 그리는 미술시간. 엄마, 아빠 그리고 집. 우리 집 마당에 묵디 묵은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수피가 회색 빛이 도는 보라색이었다. 이 나무를 그리고 싶었는데 내가 갖고 있던 크레용이라는 상품으로는 이 색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뭇거리자, 선생님이 대충 상품에 있던 고동색으로 사과나무를 칠해버렸다. 나는 그걸 보고 울어버렸다. 학창시절에 보냈던 선생님 성함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이 사건으로, 이 선생님의 이름 만큼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웃음).

낯빛을 보며 사람들의 기분과 컨디션을 읽기도 했고, 두 살 때 경험한 기억도 색이라는 잔상으로 남겨져 있기도 했다. 그렇게 색에 민감했다. 그렇게 색에 대한 애착과 애정을 다시 발견한 시기가 내가 가장 가라 앉던 시기이자 염색을 시작하게 된 시기였다.

◐. 염색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동력을 얻기 까지는 그래도 몇 해가 더 걸렸다. 그리고 ‘나만의 색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첫걸음은 서른 셋 즈음에 시작되었다. 그 때가 한국도 서울 올림픽이라는 행사로 서서히 나라를 알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은 지난 세월 각자 도생만 하다 이제 겨우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 시점이라 모두가 공유하는 지식과 정보의 문화가 없었던 시기였다. 염색일도 그랬다. 초보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문 서적도, 기관도 없었다. 그러니 직접 손으로 발로 뛰며 나만의 지식과 경험으로 팔레트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걸쳐 주변 식물로 색을 만드는 테스트를 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니 이내 돈이 바닥났다. 의지와 열정 만으로는 하고 싶은 일의 충분한 동력이 될 수는 없었다.

◐. 어떻게 다시 동력을 얻어 작업을 할 수 있었는가?

그렇게 생활의 고민이 쌓여 갈 즈음, 친구가 난데없이 공무원 시험을 다시 보라며 채용공고 소식을 전해주었다. 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절박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니, 제 2의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열정의 방향을 잘 알고 있던 어머니께서 재취업을 한 내가 딱했는지, 새로 시작하는 생활에 보태 쓰라며 종자돈 오백 만원을 쥐어 주셨다. 그런데 그 돈을 받자마자 염색할 수 있는 명주베를 사는데 다 써버렸다 (웃음).

◐. 작가님은 염색을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었는가?

처음부터 염색으로 표현하고 싶은 색은 장작불이었다. 어렸을 때, 아궁이 옆에서 멍하니 장작이 불타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불이란 게 다 같은 불 같겠지만 어떤 장작을 태우느냐에 따라 불의 색도 달랐다. 유독 내가 좋아하던 색은 사과나무로 땐 장작불이었다. 회보라색의 불꽃과 불이 사그라질 때 나오는 오묘한 색이 있다. 그 불을 보는 게 어린 나에게는 최고의 유희였고, 눈으로 보았던 그 분위기와 느낌을 색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상품화된 유화나 아크릴은 너무 강렬했고, 수채화는 그나마 나았지만 재료의 유한한 한계가 있었다. 가장 적합한 것이 자연에서 추출한 전통의 염색법이었고 내가 표현하고자 한 색에 가까웠다. 그렇게 그 색에 다다르고 싶었다.

염색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할 무렵, 중국산 명주베가 막 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염색하면 날줄이 각각 다르게 물들었다. 그래서 ‘제직(製織)을 내가 직접 시켜야 겠다’고 하니 가볍게 수천 만원이 더 들었다. 마이너스 통장으로 돌려 막았다 (웃음). 자연의 식물로 염색을 하면 다들 그렇게 돈이 안 들 거라 생각하지만 원래 색이란 권위와 부귀의 상징이다. ‘홍화색’은 워낙 구하기도 힘들거니와 소량밖에 안 나와 오롯이 왕만 사용했던 색이었다. 양질의 색이란 결국 값 비싼 소재로 오랜 시간 물들여야 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돈이 든다. 그렇게 생활에 필요한 최소의 밑천으로 살고 나머지는 모두 염색 일에 쓰다 보니, 사표를 쓰고 받은 퇴직금은 은행 빚을 갚는데 다 쓰고 남은 것은 고작 몇 푼이었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성과라면 2006년 즈음, 열심히 달렸던 보람으로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그 색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색은 단색이기 보다, 복합적인 다양성을 갖고 있는 듯 하다.

가치가 재화의 척도로 매겨지면서 시간의 개념도 달라졌다. 모든 것이 빨라지며 그 시간 속에서, 오류를 줄이기 위한 명분으로 통일된 형식과 틀을 갖추게 되었다. 색도 색상환이 만들어지고 안료와 염료는 번호로 대표되는 색으로 고정되었다. 그렇게 시대가 요구하는 정형(定型)이 고정되면서 쪼개지는 디테일을 잃게 했다.

색은 때때로 환경과 시대를 담는다. 예전의 어르신들은 색에 대한 표현이 지금보다 훨씬 다채롭고 디테일 했다. 예를 들어, 정형화된 ‘짙은 갈색’을 ‘소똥색’이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주변환경을 빗대어 묘사했다. 그 환경을 함께 공유한 사람들은 그 색을 ‘촉촉하고 진한 풀색을 띤 초콜릿색’ 으로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후레이크 사료를 맥인 지금의 ‘소똥색’과는 달랐다. 자연의 색은 간결한 단색보다, 한층 복합적인 색을 띄었기에 그에 걸 맞는 표현을 주변의 사물색으로 묘사하며 나타낸 것이다.

◐. 염색 과정을 보면 아름다운 작업이기 보다 노동에 가깝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했는가?

염색 일은 체력을 매우 요하는 노동이다. 가뜩이나 5-22 미터가 넘는 큰 작업을 하는데 이런 천을 적시면 4,5배는 무거워진다. 체력적으로 매우 고단한데다 이 과정을 수 없이 반복한다. 담그고, 말리고… 체력 뿐만 아니라 소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자연의 식물이라 아무 때나 따서 쓸 것 같지만 원하는 염료 소재는 희귀해, 일정량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농가와 계약해서 별도로 생산하여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한 두 해 기다리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다. ‘이렇게 고단하고 힘듭니다’가 아니라 결국은 색이 말해준다는 믿음으로 사실 20여년간 몸을 너무 혹사 시켰다.

이 작업 과정을 몸과 정신이 잘 버텨내려면 나만의 신념이 있어야 했는데, 그게 ‘몸은 망치, 머리는 목수’였다. 목수가 그만둬야 멈추는 거지 몸이 멈춰서 그만둬지지는 않는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몸이 먼저 멈추었다.

오랜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53살에 사표를 던진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아팠던 몸이 사표와 함께 터져 나왔다. 어느 한 부위가 아닌 온 몸의 체계가 고장 난 느낌이었고, 이내 비경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 염색일로 몸이 너무 혹사된 것인가?

병원에서는 완치가 안된다면서 일을 중단하라고 했다. 그러던 찰나, 중국에서 공부하신 중의사가 ‘단전뜸’을 권유해주셨는데 이것이 몸 뿐만 아니라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대략 보름 동안 단전의 혈(穴)부위에 뜸을 뜨는 과정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뜸의 크기는 커진다. 그러니 그 뜨거움의 고통도 크기만큼 커지는데 그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면 치료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때부터는 몸이 아닌 생각이 나를 다스려야 했다. 의사는 낫는다고 하니 얼추 맞겠고, 뜨거우면 치우면 된다고 생각하니 이 과정은 내게도 선택권이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언제든지 ‘그만둬도 괜찮다’는 위로와 함께 ‘나는 그 동안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나’ 생각에 생각을 더해, 삶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불교의 화엄경에는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는 사상이 있다. 이때가 딱 그랬다. 생각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뜨거운 고통이 극에 달해 온갖 상념과 잡념이 교차할 즈음, 아픔이 망각되기 시작한 생각은 바로 ‘엄마의 밥’이었다. 어렸을 때, 그리고 다시 아이와 함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과연 어머니로부터 몇 끼를 얻어먹었을까… 얼추 아이의 몫까지 계산해보니 5만끼는 되어 보였다. 몸이 회복되고 어머니께 이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그러자 어머님께서는 웃으시며 ‘니는 못 갚는다, 남들에게 갚아 주라’고 말씀해 주셨다.

사진: 어머니의 조각보

MINBO

◐. 민보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한 식물에서 다채로운 색을 뽑을 수 있는 샘플을 만들다 보니 효과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롤 별로 보여주기도 하고, 일정한 사이즈로 보이기도 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손상이 되기도 하고, 효율적으로 보이지 않기도 하니 색의 단계별로 이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느질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연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자른 천들을 생각 없이 엮다가 조금씩 형태를 띄면 괜찮겠다고 생각하니, 어느새 조각보 스타일로 엮게 되었다. 하다 보니 의외로 예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바느질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보니 생활지도사 일을 할 때 종종 어르신들께 바느질 이야기를 꺼내며 물어보기도 했다.

어느 날, 한 어르신께서 만든 거나 한번 보자며 내 바느질에 관심을 가져 주셨기에 보여 드렸다. 그랬더니 “아이구, 개 이빨만도 못하네” 하며 “다 틀렸다” 라고 하셨다. “할머니, 이것도 규칙이 있나요?” 라고 물으니 “세상만물 다 규칙이 있지, 규칙이 있어야 조각보가 안 미어지고, 해 놓으면 참하다” 라며 틀린 바느질을 짚어 주셨다. 그렇게 할머니를 통해, 바느질의 규칙을. 그리고 민보와의 연(緣)을 잇게 되었다.

◐. 민보는 조금 생소하다. 왜 덜 알려져 있는가?

똑같이 오래된 물건이라도 역사가 있고, 권위가 있고, 품위가 있으며 원래의 형태를 잘 보존하면, 희소성이라는 이름 아래 가치의 격이 달라진다. 예나 지금이나 골동품이 수집되고 대중화되는 과정은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0-80년대를 걸쳐 도회지에 여유가 생기면서 한국도 현대적 골동품 문화라는 것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신문물도 신문물이지만 옛것을 보고 그 가치를 깨달으며, 수집하고, 연구하며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유가 있다면 어떤 것을 수라(蒐羅: 널리 수집하다)하고 싶겠는가? 상태가 양호하거나, 권위 있는 궁중 혹은 이름 있는 양반의 고급스러운 물건부터 모으려 할 것이다.

자산가가 이런 취미를 붙이면 그들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가이다시[1]는 그들의 취향에 맞는 물품을 납품하게 된다. 그러니 비근한 물건 보다 상태 좋고 고급스럽고 장식이 화려한 물품 위주로 모인다. 그러한 풍(風)이 확정되면, 그때부터는 다양성보다 비슷한 물품들만 모이기 시작한다. 그 외는 찾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나머지는 소외되고 소멸된다. 그렇게 궁중과 양반들이 갖고 있던 화려한 장식용 보자기나 삼각 혹은 사각형의 면으로 구성된 조각보가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이것이 조각보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삶에 너무 깊숙이 들어온 서민들의 민보는 생활에서 쓰였던 만큼 상태가 양호하지 못했고, 그 가치를 새로이 보는 안목이 없는 한, 화려한 ‘궁중보나 반보’[2]에 비해 눈에 덜 띌 수밖에 없었다.

◐. 정형화된 조각보가 한국의 전통적인 조각보 인줄 알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보가 골동품으로서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화되지 못한 배경도 있다. 70-80년대를 걸쳐 궁중보와 반보가 거의 바닥 날 정도로 수집되자, 각종 전시를 통해 문화계 쪽의 인적 네트워크도 확대되며 보다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대중화되면서 1990-2000년대는 그 관심이 조금씩 배움으로 확대되었다.

배움이란, 쉽고 문턱이 낮으면 널리 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민보는 그러지 못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패턴도 쉽고 바느질도 쉬우면, 낭비도 없고 시간도 절약되며, 무엇보다 배우는 사람도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궁중보와 반보가 보급화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정형화된 유형을 가질 수 있었기에 시스템적으로도 가르치기에 용이했다. 그에 반해, 민보는 바느질도, 패턴도, 정형화 하기 쉽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비정형화가 민보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조각보로써 가장 많이 쓰이고 생활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것이 민보임에도 말이다.

◐. 그렇다면 민보란 무엇인가?

민보는 ‘서민들이 주로 만들어 사용한 보자기’, ‘사용 가능한 자투리로 이어 만든 조각보’ 등으로 정의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몇 가지의 큰 특징이 있다. 형태, 바느질이다.

◑. 민보의 특징 ①: 실용성이 만들어낸 형태

민보의 조각보를 보면 정형화된 삼각형, 사각형, 마름모형도 있지만, 이름 붙일 수 없는 기이한 모양이라 그냥 면이라고 밖에 정의할 수 없는 형태도 있다. 익숙한 모양과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 서로 교차되어 꿰매어 있는 민보. 이 기이한 모양이 민보의 첫번째 특징이다.

그러한 형태의 또 다른 특징은 개별적 모양을 넘어 민보를 구성하는 전체의 생김새다. 기획된 규범과 규칙이 아닌, 그때 그때 사용할 수 있는 천 자투리를 이어 만들 수밖에 없었기에, 비정렬적이고 비구성적인 의외의 형태를 띈다. 의도치 않은 형태는 생활에서 출발된 독특하고도 심미적인 것이었다.

궁중이나 양반들이 사용했던 조각보는 앞서 말한 배경에 의해 현대의 우리들에게 익숙한 조각보의 모양을 띤다. 반듯하고, 규칙적이며, 정형적인 형태이다. 의미를 담고, 미적인 면모를 드러낼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그들의 환경이 뒷받침해준 형태이다. 그러나 민보는 의미와 의도 보다 철저한 실용성과 부족함이 만들어낸다. 그래서 디자인이라는 계획을 가질 수 없다. 다음 천 자투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용될 수 있는 천 자투리가 생기면 1센치 미만이라도 사용된다. 그렇게 천 쪼가리들을 모아 헛되이 사용하지 않고 실속 있게 꿰다 보니 의도치 않은 유일한 형태가 나오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민보는 의도가 아닌 철저한 실용성이 만들어낸 미학이다.

“민보의 美는 의도가 아닌 실용성이 만들어낸 것”

◐. 가끔 민보를 표현할 때, 보자기와 조각보가 혼용되어 사용된다.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면 둘은 다른 표현처럼 느껴질 것이다. 현대의 보자기라 하면 ‘큰 천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며, 조각보는 ‘장식용 공예품’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면 둘은 큰 차이가 없었다. 왜냐면 서민들에게 온전한 ‘하나의 큰 천’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천의 가치가 지금과는 달랐다. 천 자체가 귀했거니와, 설령 있다 하더라도 옷 짓는 용도로 쓰기도 모자라 그것을 원하는 크기로 잘라 쓴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그러니 사용될 수 있는 천 자투리나 쪼가리만 있다면, 어떠한 형태든 사용 가능한 최대치로 만든 것이 민보였다. 그러니 그 형태가 여러 자투리를 이어 만든 조각보의 형태를 띌 수밖에 없었고, 사용 용도에 따라 보자기라는 이름으로 사용해도 같은 의미로 통용될 수 있었다.

민보의 사용용도를 보면 그야 말로 멀티 기능이었다. 서민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였기에 하나의 물건이 하나의 용도로 국한되지 못했다. 기능만 할 수 있다면, 가리고, 덮고, 깔고, 묶고 여기저기 갖다 붙여 사용해야 했다. 문을 만들 좋은 나무가 귀했기에 문의 기능으로서 가리개의 역할을, 밥상을 덮는 뚜껑의 역할을, 물건을 싣거나 가방의 기능을 위해 보자기로 사용되었다. 그러니 만인이 만들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한 사람이 시집을 갈 때, 180개의 조각보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작품 설명: 기질(器質)을 살리는 교정(矯正)

이러한 형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비정형적인 형태의 면과 면 사이에서 발생한 불규칙한 경계선 때문이다. 그것은 천과 천이 만났을 때 우러나오는 부분이며, 핀으로 고정하여 바느질로 누른 것이다. 이러한 형태를 의도적으로 자르라면 면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어야 가능할 듯 싶다. 오롯이 남은 자투리를 낭비 없이 사용한다는 실용성이 나은 결과이다. 그렇기에 천이 갖고 있는 원래의 결을 잘 살려서 살짝 튀어나온 부분만 바느질로 잡은 것이다.

가끔 사람도 그런 것 같다. 갖고 있는 기질을 무던하게 바꿀 필요 없이 약간의 틀어짐만 교정하면 그 기질이 오히려 좀 더 부드러운 특색으로 드러날 수 있다.

◑. 민보의 특징 ②: 실용성이 꿰맨 바느질

옛날에는 남자들이 논에 나가 일하면, 여자들은 가정일을 했다. 논 일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가정일 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평균 합계출산율이 6.9명이었던만큼 아이를 키우기는 것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이를 키우고 하루의 루틴인 식사, 청소, 빨래만으로도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나머지 집안 일은 모두 쪼개서 할 수밖에 없으니, 늘 일손이 부족하여 아이가 세, 네 살만 되면 가장 먼저 가르치던 일이 바느질이라고 한다. 내게 민보를 가르쳐 주신 어르신도 제일 먼저 한 것이 바느질이었다고 했다.

바느질의 실력은 은근히 자존심을 다투는 일이었다고 한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하다 보니 바느질을 못하면 “개 이빨만도 못한다”거나 “물두망이나 쳐라”라는 말로 자존심을 건드려, 다들 열심히 바느질에 임했다고 한다. 민보의 바느질이 다른 궁중보나 반보와 달랐던 이유는 삶에 깊숙이 개입되어 사용되어야 했기에 그 규칙이 달랐다.

천 쪼가리를 이래저래 아무렇게 꿰매다 보면 개별 조각들의 경계는 울퉁불퉁하여 높낮이가 생긴다. 그런 민보를 밥상 덮개로 사용하면 음식물에 쉽게 닿아, 늘 민보를 씻는 번거로움이 생긴다. 그래서 민보의 바느질은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뉘어서 포개어 잇는다. 한 열만 보면 쉬울 수 있으나 다열(多列)이 되면 포개지는 순서의 룰을 잘 지키며 꿰매야 한다. 민보의 규칙대로 꿰매어진 보판은 쉽게 꺼지지 않고 장력의 힘이 골고루 퍼져 평평하며 질겼다. 그러니 잘 만들어진 민보로 밥상을 덮으면 평평하게 덮여 보리밥에 닿지도 않았다. 민보는 반보보다 쓰임의 용도도 넓었고, 똑같은 천을 써도 훨씬 질기고 견고했다. 오롯이 바느질로써다. 워낙 질겨 보부상들의 멜빵 및 깔개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민보의 특징은 형태에서 오는 독창성도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바느질에서 그 특징이 더 도드라진다. 넉넉하지 못하였기에 헛되이 사용되면 안 되었고, 촘촘하고도 정교한 바느질은 오롯이 견고하고 질겨야 하는 목적에 부합되어야 했다. 오래 사용하고, 잘 버텨야 했기 때문이다.

◐. 바느질에 따라 강도(强度)가 다를 수 있다는 게 놀랍고, 민보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수선을 해야 하면 30-40대는 맡기려 하고, 50-60대는 집에서 해보려 하고, 70-80대는 자신이 직접 하려고 한다. 바느질이란 게 복잡한 것 같아도, 원리만 터득하면 단순한 반복이다. 그 반복에 매력이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미인이면 그 다음 세대도 미인이라는 말이 있다. 바느질이라는 경험도 그렇다. 뭔가 반복을 통해 생산한다는 희열을 어머니를 통해, 할머니를 통해 경험하면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고 전제되는 DNA같은 것으로 이어진다.

흔히, 바느질을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은 안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시면 옆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반복을 통한 몰두의 상태는 어린 아이의 눈에도 신성불가침한 영역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게 일삼매에 빠져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본 아이는 차분하다고 한다.

◑. 아래 작품의 설명 : 다름을 머금는 조화로운 색

자연에서 올바른 방식으로 추출한 색은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자연스럽다. 그러한 일화가 있다. 전시작업을 위해 250가지의 다양한 ‘색상 스와치’[3]를 설치하는 작업이었는데, 도와주시는 분들이 거는 일정한 순서를 요청하였지만 그냥 내키는 대로 걸어 달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될 거라고. 다들 내심 불안해하며 걸었지만 마무리가 되니 모두 놀라워했다. 어느 하나 튀는 스와치가 없었으며 좌와 우, 위와 아래 모두 하나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잘 된 염색은 다양한 색을 이어도 하나의 톤, 혹은 하나의 민보로 느낄 수 있다.

◐. 이러한 다양한 색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님만의 노하우와 기록이 있었을 것 같다.

처음 나에게 민보를 알려주신 어르신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다양한 정보를 담은 박스가 무려 3박스나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집에 물이 새서 모두 날려 버렸다 (웃음). 사실 웃을 일은 아니지만, 몇 년을 걸친 기록과 소중한 정보였음에도 커다란 상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기록이 갖는 장점 못지 않게 기록의 한계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기록자와 노동자가 달랐다. 문맹률이 높았기에 글을 쓰지 못하면 몸을 써야 했다. 그러나 기록이 모든 것을 담지는 못했다. 숙련된 노동자는 감(感)으로 일의 시종을 결정한다. 언제 그만둬야 하고, 언제 해야 하는지 그들은 글의 기록이 아닌 감으로 타이밍을 알았다. 말로 설명된 기록과 눈으로 본 것이 아닌, 손의 감촉과 몸으로 알 수 있는 온도, 그리고 맛의 감각으로 아는 지점을 말이다. 그렇게 기록은 정점으로 가는 길까지는 이끌어 주지는 못한다. 왜냐면 기록자는 보편적 지점에서 서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염색을 하기 위해 잿물을 사용할 시, 수소 이온 농도 지수가 14pH인 강알칼리의 농도에 맞춘다. 그러나 기록으로 남겨진 14pH라는 수치가 같아도 어떠한 나무로 태운 잿물을 사용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래서 원하는 색을 내려 해도 기록의 수치만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4pH라는 기록된 수치가 ‘모든 것’을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인들은 수치보다 맛의 감각으로 그 감도를 알아 낸다. 내가 들었던 것을, 그리고 내가 경험으로 이룩한 것을 기록할 수는 있지만 감은 기록하지 못한다. 기록은 분명히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정점으로 인도해주지 못한다는 앎도 필요하다. 그래서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기록을 멀리 하는게 낫다.

“말(言)은 언저리까지, 정점은 감(感)이 찾는다”

OUTRO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다 보니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배가 고플 때 하는 요리와, 배가 부를 때 하는 요리의 다름에 관해서다. 먹을 사람과 나의 상태가 같아질 때 질(質)이 좋아진다며, 근래 건강이 좋지 못해 음식이 좀 짜지는 않았는지 연신 걱정하며 물어보셨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주시고 설거지를 해야 할 즈음, 작가님은 직접 하셔야 한다며 한사코 도움을 사양하셨다. 염색 일을 하다 보니 물을 만질 때가 가장 평온하다며. 그렇게 설거지를 하시는 작가님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집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며 맞이하기보다 밖에서 먹는 일에 더 익숙해졌다. 그렇게 사람들을 대접하기도 접대하기도 또, 대접받기도 접대 받기도 한다. 그런 흔한 일상에서 어느새 우리는 대접(待接)과 접대(接待)를 가늠하는 경계를 잃어버렸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덧 시중을 들고 시중을 받게 되는 접대에 익숙해져, 마땅히 예(禮)를 갖추어 정성으로 대하는 대접을 망각하게 되었다.

모든 행동과 관계에서 목적이 범람 하는 사회에서는 감성과 정성을 담아내는 표현이 남발되고 상투화 된다. 그래서 그 말이 갖는 본연의 의미가 퇴색된다. 이런 생각이 교차될 즈음, 다시 작가님의 뒷모습을 보았다. 오늘날 우리가 보지 못한 혹은 너무 범람 되어 보지 않으려 한 것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뒷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는 작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세상의 흐름이 어떠하든, 그녀의 삶을, 사람을, 자연을, 염색을, 그리고 민보를, 예를 갖춘 마음과 정성 어린 태도로 온 힘을 다해 대하였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1] 가이다시 (賣出:かいだし): 오늘날까지도 골동품 시장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며 골동품을 사서 골동품상에 납품하거나, 직거래하는 고객들에게 공급하는 골동상을 뜻한다. 골동을 평가하는 안목, 구매력 및 납품의 능력을 표현할 수 한국어가 나왔으면 한다.

[2] 공중보/반보: 궁중보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보자기 혹은 조각보이며 반보는 양반들의 보자기 혹은 조각보를 뜻한다. 이러한 표현은 학술적인 표현보다 주로 김정화 작가가 사용하는 표현이다. 더불어 민보도 서민들의 보자기 혹은 삼각보를 뜻한다.

[3] 스와치 (swatch): 직물의 견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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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바깥

이름의 바깥

쓰임의 용도가 있으면서 새로운 쓰임의 그릇

조금은 흐린 어느 날, 작가님의 작업실을 방문하였는데 밖의 흐린 날씨만큼 안도 어두웠다. 조명이 꺼져 있었지만 밝은 무채색 계열의 벽과 바닥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럭저럭 적응해갔다. 인터뷰를 시작할 즈음, 불을 켜지 않아도 불편하지는 않는지. 자신은 늦은 오후까지 조명을 잘 안 켠다며 양해를 구하는 모습에서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흑백의 색과 표면이 거칠고, 원시적인 기법으로 작업하며 익숙하지 않은 그릇을 만드는 이진선 작가. B.A.A.T. ◐에서 진행하는 9번째 작가. 그녀를,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의 이야기이다.


◐. 어린시절 어떤 성장기를 보냈는가?

‘안’과 ‘밖’이라는 경계가 있다면, 내성적인 성격은 대체로 밖에서 안을 구경하는 관찰자의 입장이 된다. 저 안은 어떨까, 저 아이는 왜 잘 나갈까, 저 친구는 왜 사람을 끌어들이는 걸까…그렇게 친구들을 들여다보던 매우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런 성격을 잘 알던 부모님이었기에 이사를 가도 동생과 달리 나만 전학을 시키지 않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2년이 지나서야 전학을 가게 되었다. 부득이 집과 학교의 거리가 있었지만 버스보다는 걸으며 하루의 관찰을 곱씹으며 나와의 대화가 많았던 아이였다.

“나와의 대화가 많았던 아이”

◐. 외부를 관찰하던 시점이 자신의 내부로 바뀌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인가?

중학교때 일말의 사건이 있었다. 여느 또래와 다를 바 없이 친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반이 바뀌면서 나만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배제되어 고립된 것 같았다. 뜻하지 않게 학교생활이 힘들어져 어머니께 넌지시 고충을 털어놓으니, 시니컬한 어머니께서 의외로 ‘별거 아니다’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의외로 이 조언이 나에게 크게 작용하였다. 어머니께서 ‘아이들과 잘 어울려야 한다’고 꾸짖으셨다면 그 방식만이 답이라고 생각되어져 나의 시간이 부정당한 느낌이 들었을 거다. 그러나 ‘별일이 아니니 너에게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보라’는 조언은 또 다른 삶의 방식이자, 나에게 더 맞는 옷 같았다. 이 조언 덕에 다시금 학교 생활도 적응해 가며 친구들도 사귀었지만, 자신에게 몰두할 시간의 여지는 늘 집착 아닌 집착으로 확보해갔다.

◐. 어떻게 보면 어머니의 조언을 통해 ‘다름’을 빨리 자각하신 것 같다.

혈연으로 구성된 가족조차 각자의 스타일이 있다. 여동생과 어머니는 밖으로 돌아다니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반면 나는 나에게서 에너지를 충전한다. 그래서 주말은 그저 집에서 잠만 잔다. 정말 잠만 잔다 (웃음). 아직도 가족들은 이런 나를 두고 별종이니 귀신이니 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가족안에서도 서로 다른 모습들을 일찌감치 파악하면서 내가 이상하기 보다 다른 포인트가 있나 보다 했다. 애써 나를 부정하며 활발한 나로 만들려 하지도 않았고, ‘이상하다’는 의미를 ‘이상하지 않다’로 전환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그들과 맞춰 나가기 보다 나의 다른 특징을 파악하면서 맞는 방식을 찾아 갔던 것 같다.

◐. 도예를 하기 위해선 예체능을 선택해야 했는데 어떠한 연유에서 하게 되었는가?

수학을 못했다. 그래서 수학만 안보면 됐다 (웃음). 그게 어떻게 보면 미술에 쉽게 다가가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종이나라에서 주최하는 종이접기에서 3등을 하기도 했다 (웃음).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미술에 관심도 있었지만 앞서 말한, 수학이 싫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컸다. 수학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은 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를 관찰하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학창 시절에 ‘프로젝트 런웨이’라는 방송에 한참 빠져 있었는데 패션이 너무 멋있어 보였고, 패션디자인이 내 꿈이라고 생각됐을 정도였다. 그런 어느 날 내가 ‘왜 이 방송을 좋아할까’를 면밀히 관찰해보니 프로젝트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미친듯이 몸을 움직이면서 만들어 내는 것에 흥미로워했다. 패션이기보다 치열한 몸의 움직임. 즉, 손을 사용하고, 몸을 움직이며 땀으로 이루어진 과정으로 결실을 맺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머리에서 만들고, 말로서 표현하기 보다 몸을 사용해 만든 결과로 소통하는 것이 좀 더 나에게 맞겠다고 판단되었다.

◐. 공예과에도 다양한 분야가 있을 터인데 최종적으로 도자기가 선택되어진 이유는?

대학은 공예과로 왔지만 1학년때는 세부 전공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말씀하신 것처럼 목공예, 금속공예, 유리공예, 염직공예, 도예 등 다양한 공예분야가 있었지만 도예와 금속공예로 좁혀지다 최종적으로 도예가 선택되어진 이유는 작업과정에 있었다. 금속공예는 작업실에서 망치를 두드리고, 쇠를 자르고, 가공을 주로 하는데 그렇게 작업을 끝내고 도예 작업실에 오면 새삼 느끼는 것이 고요함이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안온하게 오는 평온함이 좋았다. 그렇게 조금씩 나와 맞는 것을 알아가며 찾아진 것이 도예였다.

◐. 작가님 작업의 큰 맥락은 그릇이라는 주제인데 이 주제의 동기는 무엇인가?

대학교 때 주로 코일링 기법[1]의 작업을 하다 보니 대학원의 논문 주제도 이 기법으로 만들어진 그릇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주제를 환영해주지 않았다. 빈약하고 얕은 주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릇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길래 그렇게 느끼는지 깊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며 여러가지 조사도 해보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만든 그릇을 판매하며 나온 고객들의 반응에서 깨달은 바가 컸다.

대체로 내가 만든 작품의 공통적인 반응은 예쁘지만 물이 들고, 가늘고, 얇고, 깨질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자기는 어차피 깨져요’라는 설득 아닌 설득도 해보았지만 그들의 견고한 잣대에 다른 생각의 틈을 심을 여지는 없었다. 그릇에 대한 확고한 잣대는 바로 편리한 사용성과 실용성이며, 이것이 좋은 그릇이라는 정의의 기본 토대이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여기서부터 나만의 정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사용성과 실용성만큼 그릇이 지니는 형태의 아름다움도 척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내가 끌린 이유이기에 함께 공감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래서 보편성에 거스르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 보편성에 거스르는 작업이란 무엇인가?

그릇의 사전적 의미는 ‘음식이나 물건을 담는 기구’라는 정의에서 알 수 있듯, 그 본질은 뚜렷한 사용성에 있다. 그 본질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아니 부정한다고 부정되어 지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바라보는 그릇의 매력은 기(器)가 지니는 형태의 미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용성보다 우선하기에, 자연히 보편성에 거슬리는 접근이 생기게 된 것이다. 형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불명확한 용도와 쉽게 깨질 수 있다는 불편함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는 접근말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경험을 확장시켜 줄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았다. 편리하고 실용적인 그릇은 이미 많기에 실용성이 없더라도 형태가 주는 아름다움도 있다는. 그런 생각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그릇의 의미를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렇게 사용자를 배려하지 않는 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웃음).

◐. 작가님의 작품은 외부의 관찰을 통해 내부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 같다.

그릇이라는 형태는 무수히 많겠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그리는 그릇의 이미지가 있다. 바닥과 입구가 있는 가느다란 원통의 좁고 깊은 형태의 그릇이다. 가늘고 좁은 형태라 쉽게 쓰러질 것 같이 불안하지만, 보기에 따라 중력에 맞서 꿋꿋이 서 있는 형태이기도 하다.

나라는 사람을 보면 예민하고 불안을 안고 있다. 현재의 불안, 미래의 불안. 무슨 일이 생기기전부터 최악을 염두에 둔다. 상처받는 것도 싫고, 상처받지 않았음에도 예방주사처럼 미리 불안에 대비한다. 역설적이게도 불안정한 상태는 나에게 안정감을 찾는 장치가 된다. 앞서 말한 그릇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그런 나의 내면을 투영한다. 낮고 입구도 넓은 형태를 띄면 만들기도 쉽고 안정감도 있다. 편하게 많이 담을 수 있는 느낌이 마치 포용력이 넓은 사람과 같다. 반면 높고 입구가 좁은 형태를 띄면 만들기도 어렵고 무엇인가를 담기에도 불편하다. 그러나 깊이를 만들어낸다. 만지면 깨질 것 같고, 어떻게 저렇게 가늘고 긴 것이 서 있을 수 있을까…그런 나의 관점과 내가 갖고 있는 성격이 자연스레 내가 만드는 것에 묻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성향도 삶의 또 다른 하나의 방식임을 은연중에 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불안은 안정감을 찾는 장치”

◐. 도자기 이외에 다른 것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는가?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성향이다 보니 다른 것에 눈길이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밀히 말해 하고 있는 것도 벅찬데 다른 것을 볼 여력이 없다는 것이 맞겠다. 우선은 지금 하고 있는 도자기를 잘 하고 그 다음 여력이 생기면 ‘그때 생각해 봐야지’라고 했지만 아직도 도자기만 하고 있다 (웃음). 그리고 아직 도자기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다. 그래서 딱히 다른 것을 고려하지는 않는 것 같다.

◐. 작가님이 만든 작품은 주로 흑백의 컬러와 거친 표면의 작품들이 많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색을 완전히 배제하는 특별한 의도는 없다. 다만 색을 입힐 경우, 흙이 갖고 있는 고유성보다 안료의 느낌이 강해져 아직은 ‘이거다’라는 느낌을 찾지 못했다. 이런 연유로 유약도 동일하다. 매끈한 유약이 도자기 표면에 입혀지는 순간, 흙이 갖고 있는 원시적 고유성과 거친 느낌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주로 그릇 안쪽만 유약을 사용하고 겉표면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고려하는 점은 흙이 갖고 있는 본연의 물성이기에 그 부분의 손상을 우려하는 듯하다.

◐. 흙이라는 물성과 질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나의 작업기법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대체로 ‘도자기 만들기’를 연상하면 물레를 돌려 만드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물레는 좌우의 대칭을 균일하고 정밀하게 다듬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자기에 유약을 발라 구우면 완성도 높은 매끈한 도자기가 된다. 반면 내가 사용하는 작업기법은 코일링기법과 핀칭기법[2]이다. 인류가 최초로 도자기를 만들던 성형기법이라 매우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기법의 성형방법이다. 단순한 기법 덕분에 흙의 촉감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도자기 표면에 흙과 손의 흔적을 날 것 그대로 남길 수 있다. 그날 그날에 따른 나의 컨디션, 때로는 떨림이 있는 긴장 등 나의 감정이 고스란히 손을 통해 흔적으로 남는다. 그래서 흙이라는 소재의 물성과 온전한 내가 하나로 이어진 느낌이 강하다. 이것이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거나 유약 및 색으로 덧칠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표현하고 싶은 이유인 것 같다.

◐. 이번 밪◐의서의 전시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진행하였는가?

밪◐ 전시회를 통해 처음 다도구를 만들어보았다. 이때껏 나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만들던 것에 반해 차도구는 용도가 너무 명확했다. 용도가 명확하다는 것은 규칙과 틀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다도구를 전문으로 하는 작가가 아니기에 초반에는 만들기 쉽지 않았다. 반면 다도구의 다양한 종류와 세세한 디테일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경험적 측면은 있었다. 그렇게 어려움과 새로움이 교차되던 시기에 보편적인 다도구의 경험과 내가 주고자 한 경험사이의 간극을 조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상이한 두 관점을 적절히 섞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쓰임의 용도가 있으면서 새로운 쓰임의 제시도 될 수 있는 것. 그렇게 ‘쓰임-새-쓰임’라는 주제 아닌 주제가 머리 안에 그려졌다. 차도구처럼 명확한 용도를 위한 작업보다 사용이 불편하더라도 내가 느끼는 관점에 주안점을 주었기에 내가 느끼는 차도구를 만들면 됐다. 쓰임의 용도는 있지만 달리 해석되어질 수 있는 새로운 쓰임으로.

“쓰임의 용도가 있으면서 새로운 쓰임의 그릇”

◐. 밪◐에서 전시되어질 작가님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인가?

처음 전시회 제의를 받았을 때 두가지 고민이 떠올랐다. 내가 다도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산수화티하우스>라는 이미지와 달리 너무 쌩뚱 맞은걸 하면 안되겠다는 외적인 이유가 하나. 반면 도구의 용도를 명확히 하지 않고 확장된 시각으로만 바라보던 나에게 차도구라는 명확한 용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내적인 상충이 다른 이유였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어떻게 이 간격을 새로운 관점으로 설득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심이 컸다. 그런 고민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한 것은 ‘다도구의 형태는 빌리지만 다른 쓰임으로 존재해도 괜찮겠다’는 시각이 형성되고 나서 이다. 차뿐만 아니라 다른 것으로 연출해도 자연스러운 것. 차호는 차호지만 주전자라는 물성으로 이해해도 자연스러운 것. 이러한 관점이 잘 전달되면 좋겠다.

OUTRO

가끔 지나치게 밝거나 명확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정확히는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된다. 익숙하고, 당연하다는 인식에 틈이 없으면 다름은 싹트지 않는다. 그녀가 성장해 온 과정은 ‘다르다’가 ‘이상하다’와 ‘틀리다’가 아님을 끊임없이 증명해 가며 조금씩 다름을 자기화 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섬세하게 최소화하며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던 이진선 작가는 자신과 작업의 접근을 자신만의 정의로 다듬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릇에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그릇에 대해서도 생각해볼만 하다.


[1] 코일링기법: 도자기 성형의 한 기법으로써 흙가래 성형이라고도 한다. 흙줄을 돌돌 말아 아래에서부터 겹겹이 쌓아 올리면서 형태를 만들어 가는 기법

[2] 도자기를 만드는 데 최초로 사용한 방법 중에 하나로써 점토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꼬집듯 성형하는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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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구를 위한 도구

다도구를 위한 도구

고연산방. 김동완. 나무산조. 단장요. 류연희. 유남권. 이진선. 이혜진. 전수빈. 조인성. 조장현


차를 우리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

차를 즐겁게 우릴 수 있는 도구들

그렇게 차를 마시기 위해 우리는 직간접적인 도구를 사용합니다.

차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쉼의 겨를이자, 유희의 놀이입니다.

그래서 차는 마시는 과정이 있고,

도구가 있습니다.

각 도구들은 역할이 있고,

관계를 형성하며,

가치를 만들어 갑니다.

물이 흐르듯 유연하게

도구의 노릇은

차를 대령합니다.


사진. 김일다 / 포스터. 이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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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구전 茶道具展

차도구전 茶道具展 - 홍두현

이번 전시는 ‘진화’가 다름이다

인터뷰/사진. 김일다

◐. 밪◐에서의 두 번째 전시회다. 작가님에게 이번 전시회의 의의는 무엇인가?

작품은 구상되어 지고, 만들어 지고, 작업실에서 보관되어지다 전시장에 놓이게 된다.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으로써 누구보다도 작품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온전히 작품을 마주하는 시간은 공교롭게도 관람객과 동일한 전시공간이다.

그렇게 첫 번째 전시에서 내 작품을 관찰하다 보니 진행하려던 두 번째 전시의 계획을 수정하게 되었다. 두 번째 전시는 원래 계룡산 분청으로만 구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첫 번째 전시에서 주로 구성되었던 백자들을 관찰하다 보니 무언가 더 이어 발전시켜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싹트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첫 번째 전시회 보다 이번 전시회는 스스로가 조금 더 편안해진 느낌이 들어 그 느낌이 고스란히 작업에 묻어 나오길 바랬다.

◐. 그렇다면 이번 전시의 백자는 이전과 어떤 점이 다른가?

제작년의 전시. 즉, 첫 번째 밪◐에서의 전시는 청화백자 중심으로 구성되어 순백자는 약간의 맛보기 형식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 전시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발전시키고 싶었던 백자는 바로 순백자를 뜻했다. 그렇게 첫 번째 전시의 비주류였던 순백자가 이번에는 주류로 구성되어 뭔가 다른 맛이 느껴지게 조금 더 진화시키고 싶었다. 디자인적으로는 위트와 함께 조금 더 회화적인 면을 부각시켰고, 외적으로는 더 곱고 화장토를 입힌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게 가장 기초가 되는 흙의 배합부터 달리 가져가며 유약과 함께 수 없는 테스트를 거쳤다. 그 반복되는 테스트의 기조에는 다도구가 있었다. 다도구는 다른 도자기와 달리 맛에 영향을 미치는 도자기(器)라 흙의 배합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굽고 마시면서 계속 테스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차가 맛있게 우러나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기에. 그렇게 질적으로도 진화시키고 싶었다.t

“이번 전시는 ‘진화’가 다름이다”

◐. 원래 계획하였던 계룡산분청도 선보이는가?

순백자와 비슷한 비율로 원래 계획하였던 계룡산 분청도 선보인다. 계룡산 분청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뭐랄까…계룡산 분청의 소재인 흙을 만지고 붓질하며 물레에서 돌리다 보면 예전의 도공들이 어떻게 만들었을 지 그 느낌을 짐작할 수 있다. 무늬도 정통(正統)의 엄격한 기준에 의한 접근보다 대충 그린 듯 추상적이며 회화적인 면들이 많다. 계룡산 분청은 뭔가 ‘논다는 느낌의 자유로움’이 있다. 그래서 그 느낌대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렇게 형식도 크게 구애 받지 않고 주기나 화기, 식기 등 다양한 형식의 도자기들로 구성하였다.

“계룡산 분청은 놀이의 기(器)이다”

◐. 이번 전시는 조금 더 편안해졌다고 했는데 어떤 면이 편안해졌는가?

안심? (웃음). 밪◐에서의 첫 전시 때, 많은 분들이 와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신 덕분에 숙제를 잘 마쳤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부담이라는 짐에서 자연스럽게 안심이라는 편안함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다시 작업으로 이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물레 앞에 앉아도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 이유는 바로 ‘내 것을 다시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또 다른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도자기 작가들은 공감하실거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지, 같은 것을 반복하여 만들어야 한다는 측면은 마음가짐에서부터 어려워진다.

역설적이게도 기계처럼 반복하는 것이 오히려 새로운 것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래서 내 안에 숙제의 당위성을 찾아야 했다. 똑같은 반복 안에 다름을. 그것이 외형의 변화가 아닌 질적인 변화로의 깊이였다.


OUTRO

도자기는 형태의 유사함 속에 다른 스타일이 있고, 그것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찾고 즐긴다. 그래서 작가는 반복과 독창 사이의 균형을 늘 숙제처럼 달고 산다. 밪◐에서 두 번째 전시회를 준비하는 2022년의 홍두현작가는 2년 전의 그와는 같으면서 달랐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고자 했던 것이 첫 번째였다면 이번 전시는 그 방향이 스스로에게 향해 있었다. 그 과정에 발전과 혼란, 만족과 피로 모두가 혼재되어 보였다. 그 속에서 그가 몰두했던 것은 바로 진화였다. 우리가 기대하는 진화는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겠지만 정작 그 과정은 혼란 속에서 문득 튀어나오는 과정 일지도 모른다. 그런 정의라면 이미 두 번째 전시회를 통해 그는 새롭게 진화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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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ols

Stools - 안문수

머리에서 만들고, 또 손으로 만든다

인터뷰/사진. 김일다

I. 기억의 자리

굽은 선들이 겹겹이 둘러 쌓여 있는 완만한 언덕 능선에 올리브 나무와 포도나무까지 갖춰져 있다면 전형적인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의 이미지다. 거기가 고향인 이태리 친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토스카나의 이미지답게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그렇게 친구의 집을 둘러보던 중, 아이가 앉을 만한 아주 낮은 의자(스툴)가 눈에 밟혔다. 가구는 아주 소박했으나 낡다 못해 나무에 광이 났으니 분명 여러 사람들의 손 떼가 묻은 의자였다. 친구한테 물어 보니, 자기가 어렸을 때 사용했던 의자인데 이미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집안에 있던 의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 자기 아이에게도 자연스럽게 대물림 될 거라고.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고, 그 선물이 공간에 자연스럽게 스미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대와 시대를 잇는 의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그 때부터 한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II. 일상의 자세와 의자

우리의 하루를 자세의 관점에서 보면 일어남으로 시작하여 ‘앉고 일어남’을 수 없이 반복하다 다시 누워 일상을 마무리 한다. 깨어 있는 동안에 인간은 주로 일어나 있거나 혹은 앉아 있는다. 오늘날, 서있을 때를 제하면 대부분 앉는 행위에는 의자라는 도구가 있다.

어디를 가도 흔하게 있는 의자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현존 하는 가장 오래된 의자는 고대 이집트 시대인 4천 6백 년 전에 제작된 헤테프헤레스 1세 왕비의 의자이다. 지금처럼 실용성과 미적인 요소보다 앉는 자의 권력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자 앉지 못한 자는 복종의 지위를 각인하는 장치였다. 조선시대 임금의 자리인 어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권력을 상징하는 의자는 단계도 높고 화려했다. 의자의 상징성은 오늘날까지도 언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권력을 상징하는 영어 단어 Throne (권좌,權座)의 어원은 Thronos (스로노스), 그리스의 옥좌를 뜻하며 회장님 등 각종 높은 직위를 나타내는 표현 또한 의자의 은유적 표현인 Chairman(체어맨)이다. 그런 의자의 상징은 오늘날 43-47센치의 높이로 모든 것이 평준화되어 기능성과 미적인 요소가 주된 고려 사항이 되어 ‘모두의 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권력의 상징은 ‘일하는 이미지’로 변모되어 그 의미는 이미 많이 퇴색되었다. 그런 평준화의 이미지가 가장 도드라진 의자가 바로 등받이도, 팔걸이도 없는 스툴이다.

“의자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III. 스툴 (Stool)

등받이도 팔걸이도 없는 스툴은 그저 엉덩이만 받쳐주면 되는 의자이기에 높이도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앉는 행위로만 보면 그저 몸만 가눌 수 있으면 된다. 심지어 오늘날의 스툴은 앉는 기능을 넘어 책이나 각종 소품을 놓는 가구의 기능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상징적 의미로 본다면 스툴은 탈권위적이고, 탈획일적인 도구가 되어 자유분방한 오늘날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의자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대표적인 전형을 보인 스툴 중에 하나가 바로 1933년에 제작된 알바알토의 ‘스툴60’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아는 스툴의 전형(典型)은 당대에는 파격(破格)이라는 형식으로 나온 것이다.

“전형은 때로는 파격에서 출발한다”

의자의 역사는 ‘권력의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의자에 공평하게 모두 앉는다. 시대의 변화는 자연스레 의식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런 변화는 때론 형식에서부터 시작된다. 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의자의 형식처럼. 그렇게 ‘스툴 기획전’을 계획했을 때, 덜 획일적이고 나무를 잘 다루는 안문수 작가를 떠올리게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IV. 안문수 작가와 나무

작가님의 작업실인 ‘스튜디오 루’는 산이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어 공방에서 자연스럽게 산을 바라보게 된다. 계절의 변화를 산을 통해 느끼며 날씨가 조금만 풀릴 때면 대부분 산에서 차도 마시며 한가이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 산을 이루는 큰 외형은 나무이다.

“내가 시골에 있었을 때는 뭐든지 자급자족을 했어야 했다. 썰매를 타고 싶으면 직접 나무를 자르고 깎아서 만들어야 했다. 만든다는 것은 자연스러웠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깎고 만드는 것이 일상이었던 안문수 작가에게 나무를 다루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거다.

V. 그리고 안문수 작가

주로 아이디어는 자연을 관찰하며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영감의 선택은 예나 지금이나 안문수 작가의 흥미, 즉 재미에서부터 시작된다.

“내 안에 재미가 싹트지 않으면 마음도, 손도 안 움직인다. 그러나 ‘재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너무 상대적이다. 때로는 ‘예리함’이 나의 재미이기도 하고, 물 안에 잠수를 하다 빛이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바람에 형상이 있을까’라는 상상이 재미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바람을 형상화한 스툴도 있다”.

그렇게 안문수 작가는 재미를 원동력으로 대부분의 작업을 머리 안에서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작업한다. 그러다 문득 형상이 떠올리면 그제서야 손으로 작업한다. “가만히 보면 나의 작업 과정은 머리에서 만들고 또 손으로 만든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의미도 형상을 갖기 시작하며 구체화 되어 간다”는 안문수 작가의 말처럼 머리와 손은 분리가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로 함께 움직인다.

그래서 전시회처럼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작업을 할 때는 마지막까지 무엇을 하게 될지 스스로도 모른다고 한다. “아무리 머리 안에서 상상을 해도 막상 작업을 할 때는 그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럴 때는 그 변수에 맞춰 즉흥적으로 작업을 한다고 한다.

“작업의 어느 시점부터 스툴보다 사람들이 앉는 행위에 초점이 가기 시작했다. 나의 작업 성향상, 즉흥적인 면이 강해 전시 당일의 스툴이 어떻게 펼쳐 질지는 나도 모르겠다 (웃음). 아마도 ‘앉는 행위’에 대한 나만의 해석이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도 어떤 작업이 나올지 궁금하다” 라는 안문수 작가의 말에서 궁금증에 대한 그의 재미가 읽힌다.

“계획에서 변수를 만나면 즉흥이 재미가 된다”

REFERENCE

Interview

◐. 작가님은 어떠한 성장기를 통해 지금에 이르렀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깎고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구체적으로 전공을 고려한 것은 음악이었다. 그게 고2쯤이었는데 흔히 내 나이에 부모님들이 그러하듯, 예술을 한다는 것은 딴따라라 여겨 반대하셨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니 대학보다 기술을 배워 직장을 다니겠다고 하니 부모님의 고심은 더 깊어지셨다. 그러던 어느 날, 가끔 오시는 친척분이 우리 집에 방문하며 내 방에 와서는 그 동안 깨작거리며 만들던 것을 보며 ‘너 미대 갈래?’라고 제안하셨다. 결국은 어떻게든 대학에 갔으면 하는 부모님의 마음도 움직여 그렇게 미대를 가게 되었다. 가고자 했던 것은 음대였지만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터라 조소과는 나와 잘 맞았다. 그중, 유독 나무와 잘 맞았다.

그러나 시대의 역풍인 IMF와 졸업이 맞물리다 보니 하고 싶은 일보다는 생활이 되는 일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에 가까웠던 오디오 엔지니어 일이었고 그 사이에 결혼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일보다 규칙적이고 틀에서 벗어나는 일이 많지 않은 일을 8년 넘게 하다 보니 내면의 지겨움을 나보다 와이프가 먼저 발견하였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와이프가 ‘차라리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독려해주었고 그렇게 시작된 일이 오늘날까지 하고 있는 목공 작업이다.

◐. 나무에 끌리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시골에 있었을 때는 뭐든지 자급자족을 했어야 했다. 썰매를 타고 싶으면 나무를 자르고 깎아 만들어 놀았다. 그렇게 만든다는 행위는 자연스러웠고 나무라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니 대학에 가서 조각을 했던 것은 늘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무는 주변에 흔하게 분포되어 있어 아무 때나 구할 수 있는 소재이다. 친숙하게 별 거부감 없이 우리 주변에 있는 소재라는 친근성이 있다. 그래서 여행을 가거나 낯선 곳을 가면 늘 습관처럼 가로수를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무라는 소재는 즉흥적이고 의도치 않게 작업하는 나와 잘 맞았다. 나무라는 소재를 알면 다루기가 어렵고 변수가 많은 물성임을 알게 된다. 사계절에 따라 크기가 변해서 잘못 사용하면 여름에는 닫히는데 겨울에는 안 열리기도 한다. 딱딱하지만 부드러운 성질을 갖고 있어 그 변화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런 점이 나와 잘 맞았다.

“흔하고 변수가 많은 나무의 매력”

◐. 다양한 의자 중에 스툴은 어떠한 의자인가?

처음 스툴 제안을 받았을 때, 흥미로웠다. 그러나 막상 제작을 해보니 제약들에 가로 막혀 생각의 시야도 좁아졌다. 바로 스툴이라는 틀 때문이었다. 등받이가 없고 팔걸이가 없는 의자. 이 것이 스툴이 갖는 정의인데 이 틀이 나에게는 제약처럼 느껴져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스툴 본연의 정의보다 ‘앉는 행위’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서서히 제약이 사라졌다. 다리의 개수도, 의자의 형태도 스툴이라는 틀보다 사람들이 앉는 행위에 중점을 두면 더 넓은 의미의 스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 자유로운 작가님에게 작업은 주로 어떻게 시작되는가?

예나 지금이나 재미 있는 것이 작업의 원동력이다. 내 안에 재미가 싹트지 않으면 마음도, 손도 안 움직인다. 그러나 ‘재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너무 상대적이다. 때로는 ‘예리함’이 나의 재미가 되기도 하고, 바람에 형상이 있을까라는 상상이 재미가 되기도 하고, 물 안에 잠수를 하다 빛이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작업은 재미에서 시작된다”

◐. 작업의 소스들은 어떤 환경에서 주로 얻는가?

지금 있는 스튜디오 루 (작업실)의 맞은 편은 산이다. 날씨가 조금만 풀릴 때면 대부분 건너편 산에서 차도 마시면서 마치 내 산처럼 한가히 보내곤 한다 (웃음). 마음 같아서는 자연 속에서 일하지 않고 놀고 싶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을 관찰하며 영감이 하나 둘씩 생기게 된다. 근래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지나간 흔적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런 관심이 반영된 스툴도 있다. 옆에서 보면 바람의 형상을 나지막한 굴곡으로 표현해 보았다.

◐. 작가님의 작업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오늘날은 가구도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여 정확하게 계산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정밀하게 작업한다. 그러나 나는 스케치도 잘 안한다 (웃음). 느낌 정도만 간단히 그리지 대부분은 머리 안에서 상상으로 작업한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이 공간에 놓였을 때 어떤 느낌인지를…

어느 날 대뜸 형상이 떠오르면 물리적인 작업은 생각보다 금방 작업한다. 대체로 손은 빠른 편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돌입하면 빠르다. 그러니 나의 작업 과정은 머리에서 만들고 또 손으로 만든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의미도 형상을 갖기 시작하며 구체화 되어 간다.

“머리에서 만들고, 또 손으로 만든다”

◐. 부부가 많은 교류를 하는 것 같다. 작업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가?

처음부터 소통을 하면 내가 안 듣는다 (웃음). 그리고 그런 나를 와이프도 잘 안다. 와이프는 말을 아끼며 계속 관찰을 하다 어느 시점에 내가 막히거나 혹은 너무 몰두하고 있을 때 질문을 던져준다. 와이프는 정확히 내가 어느 시점에 들을 수 있는지를 아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점을 위해 기다려준다. 그렇게 질문은 나에게 스며 들며 다시금 생각을 정비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각도를 틀기도 한다.

그 시점이 대부분 후반부에 치중되어 있다. 이때가 와이프가 질문을 던지는 타이밍이고 의미가 형상을 띄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 밪이라는 공간에서 스툴을 어떻게 펼칠 생각인가?

밪은 일반적인 화이트큐브의 전시 공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있다. 무채색에 가까우며 공간은 다소 어둡지만 소품 하나하나가 조명 받을 수 있는 공간구성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조금 큰 작업이 될 수 있는 스툴을 구성하기에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 점을 역으로 활용하여 재미 있게 보였으면 한다. 늘 바닥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발상에서 벗어나 천장이 전시의 공간이 될 수 있고 바닥이 전시의 공간이 될 수 있다.

◐. 이번 전시에서 작가님이 생각하는 포인트는 무엇인가?

이번 전시회의 조형물은 의자. 의자 중에서도 스툴이다. 어찌 보면 스툴도 가구인데, 이 가구를 편하고 기능이 있는 의자 본연의 조형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른 각도의 조형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숙제가 있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작업실에 오는 사람마다 스툴에 앉아 보라고 한다. 그렇게 관찰하다 보니 서서히 ‘앉는 행위’에 초점이 가기 시작했다. 나의 작업 성향상, 즉흥적인 면이 강해 전시 당일의 스툴이 어떻게 펼쳐 질지는 나도 모르지만 아마도 ‘앉는 행위’에 대한 나만의 해석이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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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락변락일락 靑落變落一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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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현, Cho Jang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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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현 작가의 청자는 수 백년, 수 천년 이어 내려온 전통과 함께 “지금:現”을 담아 미래로 이어집니다. 전통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거기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낯선 느낌에서 출발하는 불편함의 시선은 계속하여 바라보게 만들고 이유를 찾게 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몇 시간 그리고 만들어낸 무늬를 지워버리고, 흙을 다시 쌓아 올리거나 붙였다가 다시 떼어내기도 하며 그 과정들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완성된 차호에 흔적으로 남습니다. 전통은 이어지나 그대로 답습되지 않고 지금의 시대를 담아 다시 미래로 이어집니다. 다도구는 찻물靑을 떨어뜨리는 기器 로서의 역할을 가지나, 형태는 그 역할의 충실함에만 있지 않습니다. 끝없는 변화가 일어나지만 물은 여전히 하나로 떨어지며 기器 로서의 역할을 지킵니다.

사진/포스터. 김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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