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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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2018-2023
산수화에서 시작한 공간이지만 차에 집중하며, 차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찾아갑니다. 산수화의 여러 어둡고 밝은 공간들을 낮과 밤, 낮밤으로 부르며, 두 단어를 함께 담아 ‘밪’이라는 이름으로 만들고 ◐은 이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기호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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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옮겨오고 시간을 담아 온

자연을 옮겨오고 시간을 담아 온 《置》

자연을 옮겨오고 시간을 담아 온 [置]

이혜진. 조인성. 홍성일


인터뷰/사진. 김일다

이혜진

◐ 학창 시절은 어떻게 보냈는가?

규칙적이고 훈련된 것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는 군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 때 도서관 사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조니 에릭슨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몸이 불편하여 부득이 입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던 그녀의 삶과, 그녀가 그린 그림에서 뭔가 예술이란 것이 멋있게 느껴졌다. 그때가 아마 작업이란 것에 몸담게 될 연결고리의 첫 기억이었던 것 같다.

평범한 여고를 다니던 어느 날, 공부를 잘했던 큰 언니가 당연히 붙을 거라 생각했던 대학에 떨어져 집안의 큰 충격을 선사했다. ‘저렇게 공부하는데도 떨어지다니!’ 하는 충격과 동시에 내 앞길을 고민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공부는 딱히 흥미가 없었기에 내가 무엇을 하고 먹고 살 수 있을지…그런 고민이 싹 틀 즈음, 동네 실업계 고등학교에 디자인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 왠지 모르게 디자인이 괜찮아 보였다. 당시에는 일반 고등학교에서 실업계 고등학교로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단지 부모를 설득하는 게 일이었을 뿐.

그렇게 나의 의지로 어렵게 선택한 학교였지만 생각했던 그림과는 달랐다. 나처럼 전공의 호기심으로 오기보다는 다른 목적을 두고 온 경우가 많았고, 그런 목적에 부합되게 학교도 전공의 깊이나 전문성보다 취업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취직을 목적으로 하다 보니 오히려 공부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대학 입시를 준비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공예과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늘 보면 현실과 이상에서 현실을 늦게 깨닫는 타입이다 (웃음).

◐ 도자기는 어떤 연유로 시작하게 되었는가?

판을 키우는 건 열정과 지구력이 한 몫 하지만 판의 인연은 의외로 주변 환경의 영향이 크다. 아직 세부적인 전공이 없던 대학 시절, 방학 때 학교에 남아 이런저런 선배들 일도 도와주며 교류하게 되면서 도자기를 빨리 접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학기가 아닌 방학 때부터 접하다 보니 수업에서는 동기들과 격차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칭찬도 받고 하다 보니 괜히 ‘도자기가 맞나봐’ 하면서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무슨 큰 뜻이 있다기보다… 그러나 연약한 동기부여를 굳혀준 것은 스승이었다.

당시 교류하던 선배들을 보면 대부분 한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으며 그들의 눈빛이 다른 선배들 보다 더 초롱초롱하게 느껴졌다. 그런 선배들의 영향인지 나도 고학년이 되면 저 교수님에게 배워야지 하며 내심 기대했는데 교수님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전통적인 답습보다 도자기를 자유로운 오브제로 보고 큰 조형물도 만들던 스타일이었기에 이 교수님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런 갈망으로 3학년 때 다짜고짜 휴학을 하고 그 교수님을 찾아가 1년을 배우게 되었다.

◐ 옹기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휴학을 하고, 1년을 교수님 밑에서 배우며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은 이 길을 계속 갈 거라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졸업 후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더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을 가겠다고 판단하여 포토폴리오 준비의 일환으로 옹기를 택했다.

그렇게 보성의 옹기제작소를 추천받고 내려 가보니 어른들 속에서 또 다른 젊은 친구가 있었다. 그게 지금의 남편이다 (웃음). 포트폴리오는 순조롭게 준비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과연 대학원을 가는게 맞는건지 생각은 더 깊어졌다. 학교보다 현장에서 더 배워 보자는 결심이 서자, 다시 보성에 내려와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 보성의 경험은 후에 작가님에게 어떤 토대가 되었는가?

학교라는 공간은 작가적 역량을 키울 수는 있지만 직업으로 고민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생활’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학교와 공장의 차이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근간은 ‘먹고 사는 생활’의 포함 유무이다. 도자기를 보는 관점과 내가 살아갈 삶까지 모든 것을 뜻한다.

내가 옹기를 배운 곳은 무형문화재 장인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운영은 4명의 대장들이었다. 일종의 디렉터급이였는데 이 바닥에서는 대장이라고 불렀다. 대부분 60대가 넘는 분들이셨고 평생 옹기만 하시던 분들이었지만 그들의 기량과 행동 하나하나에는 생활의 철학이 배어있었다. 그들의 기술과 목적은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행동이 없었다. 오롯이 흙에 쓰임이 있어야 만들었고 사용성이 있어야 제작했다. 옹기는 그런 철학이 잘 스며 있기에 도자기가 갖고 있는 기(器)의 기능을 잘 드러냈다. 이걸 배웠다.

생각으로 철학을 빚는 것이 아닌 행동이 철학이었다. 그래서 옹기를 통해 지식보다 지혜를 배웠던 것 같다.

“옹기는 기(器) 의 집약이다”
“옹기는 흙의 쓰임이 있어야 빚는다”
“옹기는 생활의 철학으로 빚는다”

◐ 옹기는 김치나 장을 담는 기(器)로써 생활의 이미지가 강하다. 옹기를 작업으로 하게 된 배경은?

1년 가까이 옹기를 배우면서 첫 전시도 하고, 재미도 느끼고, 애착도 생겼지만 고민의 그늘도 있었다. 옹기는 서민적이고 생활과 밀접한 소재로 쓰이다 보니 저평가되어 작품으로 평가받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가격도 저렴했고 경제적으로 어필도 안되었다. 어려웠다. 옹기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이 부분에 대한 고민으로 작업도 점차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님께서 사람들의 마인드를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옹기요소로 도자기를 만들라는 충고를 해주셨다. 그 덕에 옹기를 통해 내재되어 있던 실용성과 간결함이 극대화된 작업으로 발전시켜 갈 수 있었다.

◐ 옹기는 도자기와 어떻게 다른가?

기술적으로 말하면 옹기는 도자기의 한 분야이기에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도자기’라는 정의를 잘 모른다. 도자기는 도기(陶器)와 자기(磁器)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차이 중 하나가 바로 소성온도(燒成溫度: 가마를 통해서 굽는 온도)이다. 그리고 도기와 자기는 기본적으로 메커니즘이 다르다. 옹기는 도기류에 속해 소성온도가 낮고 흙의 채취도 용이하여 특별한 흙이 아닌 이상 재료상에서도 옹기의 흙은 흔해서 많이 구비하지 않는다. 대부분 현지에서 채취 가능하기에 자급자족하며 기법도 제 각각이다. 반면, 자기는 흙의 성격이 강해 작가들도 본인들만의 레시피를 통해 그들이 원하는 적합한 흙을 수집한다.

비단 소재 뿐만 아니라 자기는 틀을 잡고, 말리고, 깎고, 굽고, 유약을 바르는 등 그 공정 과정이 복잡하고 정교한 것에 반해 옹기는 흙을 붙여 물레에서 손을 떼는 순간 완성의 형태를 띈다. 유약도 잿물을 사용하고…이러한 간결함 때문인지 모든 예술영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며 실용적인 분야가 도기이다. 그 분야 중, 옹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옹기는 원시적이고 날 것의 느낌이 있다.

“옹기는 흙. 그 자체의 원시적인 매력이 있다”

◐ 옹기의 흙은 쉽게 채취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채취하는가?

우리가 흔히 분류하는 청자, 백자, 옹기 등은 외형적으로도 다른데 그 외형을 책임지는 요소 중 하나가 흙이다. 청자는 청자토를, 백자는 백토라는 특수한 성분의 흙을 채취해야 하지만 옹기는 무른 흙이면 기본적으로 제작이 가능하다. 예전에는 주로 겨울철 휴농(休農) 땅을 찾아 채취하곤 했다. 다만 무턱대고 아무 흙이나 채취하기 보다 논이나 밭에 점성이 있는 흙을 잘 찾아야 했고 쓰기 좋은 흙은 맥처럼 흐름이 있다. 그런 흙을 잘 찾아야 하지만 백토처럼 특수한 지역에 산을 깎아 어렵게 채취하지는 않고 비교적 쉽게 구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있는 곳과 흙이 멀지 않고 가까워 지역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 노산도방은 차 생산지인 보성의 이점과 사람들과 다양한 교류를 하는 이미지가 크다. 그렇게 된 계기는?

보성은 차 생산지이다 보니 일상에서도 차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래서 다원에서 저렴한 가격으로도 양질의 차를 마실 수 있었고, 인심 좋은 주인을 만나면 덖을 때, 소량의 차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차를 자주 접하다 보니 ‘옹기로 차도구를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던 것 같다.

보성이라는 매력에 눈을 서서히 돌리고 있을 즈음, 남편은 차를 좋아하는 동호회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만 자랐고 젊었던 때라 시골에 있어도 여전히 눈은 도시로 향하고 있었던 남편이었다. 그래서 시골이라는 터에 묶여 있어도 블로그를 통해서 나마 끊임 없이 사람들과 교류하며 외부에 대한 관심을 펼쳤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가 만든 작품을 블로그에 올리고, (남편이 영어를 해서) 보성과 우리들의 작품 이야기를 한글과 영어로 담다 보니 검색엔진에 잘 걸렸던 것 같다 (웃음). 그렇게 차를 마시는 사람들을 통해 보성과 우리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서서히 알려졌던 것 같다. 그러면서 천천히 작품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게 되고 더 좋은 작업을 위해 노력하게 된 동기를 갖게도 되고…

남편 덕에 나도 외부를 향한 눈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서로 다른 성격의 소유자들이었지만 이럴 때 ‘다름’이 상호 보완하며 좋은 시너지를 냈다.

◐ 이혜진작가가 바라보는 자신은 어떠한 사람인가?

홍성일 작가와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집이 거의 폐가였다 (웃음). 아는 사람을 통해 버려진 집을 추천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들 신혼 생활의 즐거움인 꾸미고, 채우는 삶은 우리와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저 누울 수 있는 공간과 작업할 수 있는 터만 있으면 됐다. 첫 집이 내 집이 아니었기에 차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만 갖고 살자는 마인드였다. 적다는 것은 언제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으니깐.

원래의 기질도 있겠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들이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 같다. 없다 보니 있는 것에 만족해야 했고, 자연에 가까우니 자연환경과 더불어 사는 방식을 생각하고….그렇게 있는 곳에서 내가 만들어지고, 생각하고, 행동 되어지는 것 같다. 그런 생활 태도가 자연스럽게 작업에도 스밀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옹기의 특징은 깎거나 붙이는 것을 최소화한다. 그런 옹기를 오래 하다 보니 흙도 필요한 만큼만 쓴다. 예를 들어, 10개의 작품이 필요하면 보통은 30개 정도를 만들어서 재워 둔다. 나중을 위해서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12,13개 정도만 만든다. 도자기가 환경오염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천 년 만년 간다. 그러니 굳이 불필요한 것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도자기도 생활도 그렇게 나에게 베어간다.

“작업은 주변에 베어가며 빚어진다”

◐ 옹기의 간결함이 작가님의 삶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 같다.

원래 갖고 있던 기질인지 삶에서 발전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옹기를 통해 더 명확해지기는 하다. 이렇게 시골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에 속해 있음을 체감하고, 옹기를 통해 실용성을 깨닫게 되니 자연스럽게 간결해 지는 것 같다. 그 간결함이 몸에 배면 억지라는 사족을 떨치며, 흘러가는 대로 흐리고, 그렇게 나를 맡기게 된다. 그러니 뭔가 억지로 하기보다 사용되지 않으면 쇠퇴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필요하면 사용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자연환경도 그렇게 눈이 가게 된 것 같다. 도자기를 만들고, 판매하다 보니 포장을 자주 하게 되는데 포장이 되어가는 과정의 어거지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데 눈이 가게 됐다. 친환경도 불필요한 행동을 한번 더 걸치면 거치면 과연 무엇이 자연환경인지 생각하게 된다. 처음부터 중복 하지 않고,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게 친환경이지 않을까…

“쓰임이 없게 되면, 쇠퇴는 자연스러운 것”
“친환경은 억지를 줄이는 것”

◐ 이번 밪◐에서의 전시 포인트는 무엇인가?

밪◐의 공간을 보고 처음 생각했던 구상이 바뀌었다. 자연에 둘러 쌓여 약간은 고립된 곳이지만 있는 대로, 흐르는 대로 살고 있는 내 삶과 방식을 담아야겠다고. 그렇게 내 주변의 풀들과 꽃들을 내 안으로 들여 넣고 싶어졌다.

‘자연에 있는 내 삶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갖고 와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잘 전달되었으면 한다.

“내 삶과 자연을 옮겨놓은(置) 화기”

홍성일

◐ 학창 시절은 어떻게 보냈는가?

아버지는 형평이 어려운 가정에서 9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의 맏이는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보다 집안의 또 다른 기둥으로써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렇게 당신은 하고 싶은 그림을 뒤로 하고 안정적인 직업인 선생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아버님을 일찍 여의었는데 살아 생전 어머님께 유언을 남기길, 자식들은 어렵더라도 대학은 꼭 보내되 막내는 그림을 시켰으면 좋겠다는 당부였다. 내가 막내였는데 일찌감치 나의 능력을 알아 보신 건지, 아니면 당신의 바램을 투영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딱히 거부감 없이 미술을 하게 되었다.

◐ 도자기는 어떤 연유로 시작하게 되었는가?

어렸을 때는 미술을 한다고 하면 다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서양화, 동양화, 디자인, 공예 등 세부적인 전공만큼 입시 전형도 달랐다. 당시에는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 뭔지는 몰라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명확했다. 그렇게 맞지 않을 것을 걸러내니 도예과로 압축되었다. 그렇다고 간절했던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적당히 갈 수 있는 전공 중 하나였다.

그렇게 도예과에 들어가 사수를 통해 처음 물레 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때 도자기라는 것을 강렬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로 도자기에 빠졌다. 돌이켜 보면 학창 시절의 나는, 강남 한복판에서 넉넉치 않은 가정환경으로 인해 경쟁적 괴리와 상대적 박탈감으로 아픔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가서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니 박탈감이나 아픔의 응어리들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 옹기를 시작하게 된 배경은?

대학이라는 공간은 아무래도 학문적인 공간이었기에 주로 관념적이거나 값어치가 있는 것을 다루어 생활적 요소인 기(器)의 기능을 충실히 배우지는 못했다. 그런 요소 중 하나가 옹기였다.

대학 졸업 즈음하여 장래를 고민하다 보니 아무래도 아카데믹한 영역보다 길드 형식의 일을 하지 않을까...그러니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되겠다 싶어 그 동안 배우지 못한 것을 배워 보자는 일환으로 옹기를 택했다.

◐ 작가님에게 옹기의 이끌림이란 무엇이었는가?

대학교에서는 마인드를 배웠던 것 같다. 학교마다 성향이 다르기 마련인데 내가 다녔던 학교는 그렇게 엔지니어가 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똑같은 것을 10개 만들면 ‘너희만의 독창성에 집중하라’며 교수님들이 다 깼다 (웃음). 물레를 잘 차거나 스킬에 집중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그런 거 잘하는 사람많다’며 말리셨다. 내심 학교도 먹고 사는 문제를 가르쳐야지 하는 불만이 있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현실적인 것을 대면하고 싶은 바램으로 택한 옹기의 터가 바로 보성이었다. 보성이 속한 호남은 옹기의 발전사로 볼 때 조금 독특한 곳이었다. 그렇게 옹기를 배운 곳은 100%로 엔지니어적인 접근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기보다 시키는 것을 그대로 만든다. 조건이나 상황이 변해도 요구조건을 지킨다. 그 맞춤을 위한 기술과 시간을 보면 거의 예술적 경지다. 그때 깨달았다. 공예 쪽은 기술의 뒷받침이 없으면 예술도 불필요 하다는 것을. 잘 만드는 기술과 미적 감각은 분리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는 것을. 그때부터 보다 본격적으로 옹기에 빠지게 되었다.

“기술이 예술이고, 예술이 기술이다”

◐ 작가님은 주로 차도구를 많이 다루신다. 그 배경은?

당연히 보성에 있다 보면 차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가 된다. 보성 전체가 다원(茶園)과 같고 식당을 가도 죄다 차와 연관된 음식이 나온다. 그러니 차도구의 아이템은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차를 자주 접하면서 차에 대한 니즈가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그 안에서 깨질 수 없는 룰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각각의 개성이 넘쳐도 깨질 수 없는 룰.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개성이 다양한 차들을 알아가며 거기에 맞는 차도구를 만들고…그러면서 깨질 수 없는 룰을 위해 나를 배제하기 시작했다. 내 스타일을, 내 색을, 내 포인트를. 그리고 배제된 자리를 차와 맛있는 차에 더 할애했다.

◐ 홍성일, 이혜진 작가는 부부이자 작가다. 작가로써 둘은 어떤 균형을 갖는가?

기존의 도자기 부부들을 보면 작가로서 99프로는 한쪽으로 쏠렸다. 이런 상황들을 봐왔기에 우리는 작가로서 ‘1대 1의 균형을 잘 잡자’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너무나 다른 우리지만 20년 가까이 살면서 하나 공통적인 것이, 서로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고 각자의 것은 각자가 한다는 것이다. 가만 보면 간섭은 하는 것 같다 (웃음). 단지 강요가 없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이것이 작업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이렇다. 예를 들어, ‘내가 틀을 만들면 너는 손잡이를 만들어’라는 분업이 아닌, 각자 자기의 영역은 자기의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단, 각자가 못하는 부분만 돕는다. 예전에 십이지를 형상화한 작업이 있었는데 나는 인형을 잘 못 만들었기에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은 있었다.

부부로서는 함께 살지만 작가로서는 공간만 공유하는 홍성일 작가와 이혜진 작가라고 보면 될 것 같다.

◐ 작가님에게 도자기의 매력은 무엇인가?

금속, 목공, 섬유, 유리와 같은 공예는 비교적 결과물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도자기는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나는 이게 좋았다. 흙을 빚을 때와 가마에 넣고 나올 때가 다르다. 그래서 생각보다 굉장히 다이나믹하고 변화무쌍하다.

◐ 작업을 하는 자신의 성향을 스스로 정의해 보자면?

무기준에서 나올 수 있는 즉흥성을 좋아한다. 즉흥성이 나오기까지 심사숙고하지만 한 가지를 오래 붙들고 있기 보다 동시에 여러가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새로운 자극과 변화에 빨라서 얼리아답터적 경향이 있다. 이런 즉흥성과 새로움 덕에 흙을 마음대로 쓰라고 하면 잘하지만 제약이 생기면 힘들어 한다.

◐ 노산도방 홍성일 작가의 특징은 스스로 무엇이라고 보는가?

예전에 꾸준히 내 작업을 구입하던 외국 바이어가 다른 한국 작가들도 궁금하다 하여 추천한 적이 있었다. 몇 해는 조금씩 구입하더니 어느 해부터 아예 구입을 하지 않자 뭔가 문제가 있나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바이어가 대답하길, 다들 훌륭하지만 다음이 예측 가능한 것에 반해 내 작업은 뭐가 나올지 몰라 늘 새롭고 기대된다고 하였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나는 기능적으로 훌륭한 테크니션도 아니고 스킬을 파고드는 성향도 아니다. 완성도를 100으로 보자면 스킬이 50이고 나머지는 새로움이라는 스킬로 메꾸는 것 같다.

“새로운 것이 나의 스킬”

◐ 이번 밪◐에서의 전시 포인트는 무엇인가?

두 가지 측면이 있을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아는 자신이 있고, 사람들이 아는 내가 있다. ‘만든다’는 측면에서 두 자아는 때때로 갈등을 야기한다. 나를 펼치고 싶은 욕구와 사람들에 맞추고자 하는 욕구.

언뜻 작업에만 한정된 이야기 같지만 다들 같은 고민이 있는 것 같다.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덮고 감춘 자아에겐 소홀하다.

그런 의미로 20년 동안 ‘노산도방의 홍성일’에 가려졌던 ‘홍성일’을 펼치는 전시회이고자 한다. 얼핏, 개인에 한정된 이야기 같지만 결국 ‘스스로 감췄던 나를 마주하는 자아’가 잘 전달되고 공유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걸 표현하는 화기(花器)에 대한 이야기다. 오랫동안 차도 마시고 차도구도 만들다 보니 차에만 국한됐던 시야가 점차 공간으로 까지 확장되어 간다. 차의 맛은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로 더욱 풍요로워 진다. 그런 공간에 꽃은 하나의 완성과 같은 것이지 않을까….하는 것이 이번 전시회에서 화기를 선택하게 된 계기다. 그런 의미로 그 동안 정제된 스타일이 아닌 많이 흐트러지고 어그러진 화기가 나오지 않을까….싶은데 나도 잘 모르겠다 (웃음).

“감췄던 나와 마주하고 어울리는 전시”
“꽃이 담긴 화기는 공간의 완성”

조인성

◐ 선생님의 작업은 오랜 물건을 통해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의 삶으로 들여다 놓는다는 선생님의 뜻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置치" 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이번 전시에 참여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나는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내 마음만큼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당장 내일 눈이 먼다 해도 난 좋아요. 왜냐하면 지금껏 보아온 아름다운 것들이 내 마음을 가득 밝히고 있으니까요. 눈을 감으면 그대로 떠올릴 수 있어요.

아직도 오만 원이든 십만 원이든 생기면 골동을 사요.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작은 소반 위에 내가 구한 물건 하나 올려 놓고 밤이 새도록 들여다 보는 그 기쁨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어요. 꼭 비싼 물건 귀한 물건이 아니라도 좋아요. 이런 기쁨을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번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옛 사람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 선생님의 작품들이 궁금해집니다. 이번 전시에는 어떤 작품들이 나올 예정인가요?

시간을 이기는 아름다움은 없어요. 몇백 년을 살아남은 고재의 아름다움,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담고 부식된 금속의 결, 낡은 골동 가구에서 살아 남은 서랍, 오랜 사연을 담던 서류함과 같은 다양한 물건들에는 전통적인 미감 뿐만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 준 아름다움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옛 물건만이 가질 수 있는 이러한 미감에 현대의 모던한 디테일을 더해 우리 일상에 "置치" 하는 마음으로 작업했습니다. 화기 전시인 만큼, 생활 속에서 화기와 잘 어우러지는 작은 가구들, 소품들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 오래된 책함을 모던하게 풀어낸 것으로 넘겨 버리기 쉽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감상 포인트는 우리 고유의 사방탁자를 과감하게 변형시킨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주요한 작법인 목재의 결구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방탁자와 책함의 조화가 너무나 모던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선생님의 의도를 조금 더 들어 보고 싶습니다.

사방탁자의 형태가 주는 의미만을 남겨 보고 싶었습니다. 소재가 목재냐 혹은 다른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방탁자가 주는 고유의 라인을 살리면서도 고재 책함의 아름다움을 죽이지 않고 싶었어요.

책함은 예로부터 무척 귀하게 여겨지던 가구 중에 하나였어요. 제가 책함을 특히 좋게 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무척 미니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시공을 뛰어넘은 디자인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21세기 누군가의 집 안에 들여놓아도 어색하지 않을 모던하면서도 미니멀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거기에 시간을 살아 남은 오랜 고재의 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그래서 나무의 물성은 고재 책함에 실어 주고, 사방탁자를 구성하는 물성은 책함 손잡이와 같은 금속으로 시도해 보았습니다. 금속을 부식시키는 과정에도 공을 들여 보고, 어떤 공간에 놓였을 때 마치 원래 그랬던 것인 양 그 공간에 스며들 수 있도록 비율에도 많은 고민을 거쳤습니다. 그 결과 금속과 유리라는 특별한 조합의 사방탁자가 탄생했고, 고재 책함과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모던한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움이지요.

“앤틱과 모던의 만남이 아닙니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도 아닙니다.
조인성의 세계 속에 置 하는 기물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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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ely Summer House

Lonely Summer House

becoming moment

Lonely Summer House

임수정.왕혜원

Ivoryandgray


‘Lonely Summer House’는 임수정, 왕혜원 두 디자이너의 두번째 전시 작업을 통해 보여지는 공간적 ‘Gesture’이자 두 디자이너 ‘고유의 시간성’ 이 visitor들과 만나는 곳이다. 크리에이티브 라이프는 시간을 초월한 ‘고유의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작업자의 고독과 맞닿아 있으며 이를 통해 미지 (unknown)’ 와의 만남이 가능해지고, being 또는 completed 가 아닌 ‘Becoming’ 을 보여주게 된다.

임수정은 leaf’s drawing’을 통해 잎들의 흔적을 패브릭 위에 가두기 보다 자유롭게 흘려보내거나 사라지게 함으로써 처음 사유하게된 (becoming moment)의 아름다움에 대해 조용하고 외롭게 공유하고자, 왕혜원은 건축적 영감을 통한 재료간의 예기치못한 만남으로 만들어진 becoming pieces를 통해 일상에서 간과되어지는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그들의 여름 Gesture를 담은 산수화 3층 공간으로 visitor들을 초대한다.

‘Lonely Summer House’ is the spatial ‘Gesture’ through the work of two designers - Soojeong Leem and Hyewon Wang in their 2nd exhibition and also the place where the visitors meet with the designer’s own temporality. Creative life has its own temporality beyond time. The solitude of practitioner allows the mind to encounter with the unknown. And thus it reveals the practitioner’s own ‘Becoming’ rather than being or the completed. Through leaf’s drawing, Soojeong Leem shares quietly and lonely the beauty thought for the örst time (becoming moment) by letting the traces of leaves øow freely or disappear rather than conöning them on the fabric. Hyewon Wang conveys the beauty that is overlooked in everyday life through becoming pieces made by unexpected encounters between materials from architectural inspiration. They invite visitors to the 3rd floor space of Sansuhwa (@sansuhwatea) containing the gestures of their Summer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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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머금는 푸른빛, 청자

시간을 머금는 푸른빛, 청자

의도가 가치를 만들며, 우연은 새로운 미를 만든다

시간을 머금는 푸른빛, 청자

고현 조장현

Cho Jang Hyun


인터뷰/사진. 김일다

◐ 작품과 비품의 경계는 무엇인가?

의도(意圖)와 아름다움(美)이 경계의 척도가 된다. 물품은 사고 파는 1차적 행위 외에 작가의 가치가 포함된다. 긁힌 자국, 어그러진 형태가 얼핏 비품 같아 보여도 그것이 작가의 의도라면 작품이 되는 것이다. 판단은 소비자의 자유로운 몫이지만 작가의 성향과 의도를 읽어 볼 필요는 있다. 작가의 계산된 행위는 의도적 행위이며 계산된 행위에는 가치를 함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작품이 밉지 않을 때다. 나의 계획과 다르지만 예쁘거나 재치가 있으면 작품이 된다.

“작품의 경계는 의도가 있거나, 재치가 있거나”
“의도가 가치를 만들며, 우연은 새로운 미를 만든다”

◐ 도자기는 기계로 찍을 수도, 손으로 만들 수도 있다. 수작업의 매력은 무엇인가?

기계와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변화'이다. 일정한 틀로 동일한 결과물을 내고자 한다면 기계가 훨씬 낫다. 사람의 차이는 계속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수작업의 매력이다.

“손은 변화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 예전과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어떠한 변화가 있는가?

손과 머리에 “틀”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게 척도가 되고 갇히게 된다. 예전에는 도자기에 흠이 생기거나 물이 새면 흔들렸다. 잘 못 만들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판단하지 않고 지켜볼 수 있는 면역력이 생겼다. 그 과정을 극복했다고 하기 보다 속이 썩어서 벗어나 버린거다 (웃음).

쭉 참고 가다 보면 어느새 사람들도 ‘원래 그런가 보네’하고 넘어간다. 꾸준히 하다 보면 사람들도 익숙해지며 동화된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가 끌려간다.

“지속은 사람을 동화시킨다”

◐ 그렇다면 기술자와 작가의 차이는 무엇인가?

도자기를 어떻게 보느냐는 각자의 생각에 달려 있지만 단순히 기술만 전수받아 생산하는 것은 그냥 직업이고 우리는 그들을 도공(陶工)이라고 한다. 옛 것을 얼마나 정교하게 재현 하느냐가 관건이지만 그 기반은 흉내에 있다. 흉내는 흉내에서 끝난다.

반면 작가는 자신의 가치를 자신의 방식으로 작품에 투영하며 버티는 사람이다. 단단하면 좋겠지만 늘 논쟁에 시달리며, 설득력이 있든 없든 그 가치를 계속 끌고 간다. 둘 중, 어느 것이 우위라는 개념은 없지만 그 차이는 분명해 보인다.

묵묵히 자신의 생각을 투영하며 도전하는 자세만큼, 묵묵히 기술의 승화를 위해 끊임없이 손에 익히려는 자세 또한 아름답다.

◐ 작가님은 아이러니하게 청자의 전통과 새로움이 공존한다.

대부분의 청자는 색도 진하고 유약도 두껍게 바른다. 이것이 하나의 정통이 되어 시대와 시대를 이어가며 계승해나갔다. 얕은 바다처럼 얇게 칠하니 고려청자 특유의 맑고 투명한 비색을 발할 수 있었다. 모든지 전통을 답습만 하면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 습성을 버려야 새로운 것이 보인다. 고려청자도 청자의 습성을 버렸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뭐든 오래하다 보면 머리가 아닌 몸의 습성이 베어 깨기가 쉽지 않다. 고려청자는 어떠해야 하며, 백자는 어때야 하고, 다도구는 어떠해야 한다는 정해진 틀은 없다. 보편적으로 익숙한 편안함은 있겠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내가 만들고 나만의 해석을 담다 보면 때로는 보편성을 해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움은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습성을 버려야 새로움이 보인다. 흙이 바뀌고, 재료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형식도 변하고 형태도 바뀐다.

“전통은 정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습성을 버릴 때 새로움을 맞이한다”

◐ 다도구에 동물의 조각상이 간혹 있다. 어떤 작업인가?

집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가끔 새들이 들어온다. 한참을 있다가 나가기도 하고. 개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훈이다(닥스훈트). 내 주변의 일상을 담는다. 찌그러진 호는 작업하는 테이블 모서리에 눌러서 만든 거다. 그렇게 일상을 관찰하고 일상의 요소들을 활용한 작업들이다.

“일상의 관찰이 담기는 다도구”

◐ 작업실이 어수선함과 개방의 애매한 경계인 것 같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옛 작업부터 지금까지 모든걸 펼쳐 놓고 본다. 혹시 놓친 게 없는지.

◐ 특별한 연이나 줄이 없었음에도 중고등학교는 화교학교를 다녔다. 그 이유는?

온전히 아버님의 제안이었다. 아버님은 법대 출신임에도 운동도 잘하셔서 태권도 격파왕을 거머쥐기도 하셨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정치권의 부름이 지속적으로 있었으나 강한 애향심으로 늘 고향에서 무엇인가를 하기를 원하셨다. 그런 여러가지 마음이 전공과 상관없는 도자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 같다. 연줄이 없었기에 스승 없이 직접 부딪히며 배우셨다.

◐ 아버님은 조장현 작가에게 도예가로서 어떠한 분이었는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답변보다는 ‘늘 책을 읽으라’고 하셨다. 아마도 당신께서는 스승을 통해 배우기 보다 스스로 깨우치며 해쳐 나가야했던 환경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이게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되며, 머리를 통한 학습은 몸으로 익혀서 완성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당장의 대답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습득하여 숙성되기를 바라셨고, 그것이 정밀한 대답에 가깝다고 보셨다. 그래서 잘 안 알려주셨다. 못쓸 사람이었다 (웃음).

“머리를 통한 학습은 몸의 습득으로 완성”

◐ 작가로서 놓치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손과 기술을 숙달시켜 일정 수준을 넘기는 도예가를 우리는 흔히 장인이라고 한다. 만약 이러한 정의가 장인이라면 나와는 거리가 있다. 배척이 아니라 그냥 다른 성향 때문이다. 하나를 쭉 만드는 것이 기술적 측면에서도 효율적이다. 손이 익숙해지면 그만큼 오차범위도 줄어든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손을 어색하게 한다. 어색함을 손에 베개 하는 것이 내가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손이 어색해 지면 자연스럽게 정형화된 틀과 거리를 두게 되며, 그 거리를 통해 불안정한 상황이 놓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늘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어색한 손은 새로움을 준비한다”

◐ 유랑적인 과거에 비해 ‘무등도요’는 정적이다. 터를 옮기지 않는 특별한 이유는?

아버님이 정착하신 터가 여기다. 그리고 아버님의 병세로 올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유랑의 습성이 남아 있던 터라 늘 집에서 도시가 보이는 저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외향적인 성향으로 보지만 고요함 속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이 터에 나도 정착하게 되었다.

◐ 자신의 성격을 규정해보면? 그리고 그 성격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형제자매 중 아버지의 성격과 외모를 가장 많이 닮았지만 뭔지 모르게 아버지보다 많이 딸리는….급수가 떨어지는 아버지? (웃음). 그러나 일을 잘 저지르고 고민을 많이 하는 타입이다. 우유부단하다는 말도 듣지만 각도를 달리 보면 신중하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무엇이 다른지를 꼭 알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가격은 왜 차이가 나는지. 이걸 알면 또 그 외의 것들을 찾아본다. 좋은 일에도, 악수를 뒀을 때도 그 과정을 복기하는 편이다. 그래서 오래 걸린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혼자 판단해야 했고, 혼자 결정해야 했고, 그 뒤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던 환경 때문이지 않았을까. 신중한 성향은 안정성을 향할 것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즉흥적인 선택도 많았다. 그렇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호기심이 생기는 것들을 공부하기도 했다. 유유자적하며 관찰과 탐구를 놀이로써 즐겼다. 잡다하게 기억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러한 지식들을 안정적인 도구로 활용하기 보다 본능의 자양으로 활용했다. 작업을 할 때도 꼼꼼하게 기록하기 보다 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흘린다.

◐ 그렇다면 작업을 대하는 작가님의 마음가짐이란?

얽매이지 않으려 하나 묶인 게 많다. 분청, 백자도 좋아하지만 의도적으로 청자를 잡지 않으면 벗어난다. 그래서 청자에 얽매이려 한다. 다른 것에는 자유롭더라도. 자유를 갈망하지만 얽매이고 싶어하는 모순 (웃음).

청자에 얽매이고 싶은 이유는 아버지에서부터 내려 오는 대(代)도 잇고 아름다운 걸 잡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대(代)는 내가 잇고 싶은 것이고 청자는 나에게 아름다움이다. 이미 아름다움을 봤으니 나와 시대가 담긴 아름다움을 찾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내가 가져 가고 싶은 설정의 틀이다. 스스로 청자 안에 갇혀서 변화를 모색해 간다.

◐ 작가님에게 맞는 흙이란?

흙은 사람처럼 개별적 특성이 있다. 그 특성을 꾸며줄 수도, 변화를 줄 수도 있지만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각각의 성격과 특성을 아는게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맞는 흙이기 보다…내가 흙에 맞춘다 (웃음).

◐ 작가님에게 작가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직업을 택하면 직업의 책임과 사명감이란 게 있다. 간단하다. 내가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간하는 일이다. 그러나 생존이 척박하면 이러한 것들을 잊고 움직인다. 오늘날 내가 무엇을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휩쓸려 가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적어도 스스로 분간할 수 있는 그런 도예가 혹은 작가. 아니 사람이 됐으면 한다.

◐ 좋은 차도구를 추천한다면?

차는 마시는 음료이자 다도는 나를 닦는 수행이기도 하다. 나를 닦는 관점에서 보면 좋은 다도구를 찾기 보다 다양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도구의 이해를 갖는 것도 방법이다.

◐ 작가님의 작업을 특정 시기로 구분해보면 어떠한 과정을 걸쳤는가?

변화의 길목으로 구분하자면 그 첫번째는 대부분의 도예가와 비슷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도구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며 편리하고, 잘 사용될 수 있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두번째 시기는 첫 번째가 익숙해질 무렵, ‘이거 심심한데?’, ‘여기서 뭐가 나아질 게 없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긴 시기이다. 사용성에서 벗어나니 주변을 보고 문화를 보면서 도자기의 변화를 모색하려던 시기였다.

세 번째는 그 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걸 거부한 시기이다. 기(器)라는 틀에서 변화를 모색하려 하니 딱딱해졌다. 고려해야 할 것도 많았고, 그래서 부정을 한 시기이다.

네 번째 시기는 이해의 시기이다. ‘이 부분은 배척해도 되겠다, 이 부분은 도구로써 인정해야겠다’ 등 스스로의 이해가 생기면서 타협점과 타당성을 갖추게 되었다.

다섯번 째에 들어서야 장난과 놀이가 된다. 장난을 쳐야 새로운 기법이 나오며, 특성도 생긴다. 그래서 부담을 덜 가지며 작업한다. 아니면 말라는 식으로 (웃음). 뭐든 부담 없는 시도에서 많은 것이 정리된다. 도자기는 기(器)이기에 미세한 변화가 엄청난 변화이다. 이러한 의식과 인식이 없으면 변화가 안 생긴다. 이 모든 과정이 순차적이기 보다 돌고 돈다.

“장난을 쳐야 새로운 기법과 특성이 나온다”

◐ 고려청자의 매력은 무엇인가?

고려청자는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비색 (翡色)’이다. ‘고려청자의 빛깔과 같은 푸른색’을 띈다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청자의 색을 최고의 아름다운 색으로 빗대었다. 단어의 찬사는 고려청자의 빛이며, 유색이며 빛깔이었다.

오랫동안 고려청자를 접하다 보니 종종 그 색을 자각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비색이라는 품위에 걸맞게 넋을 잃고 보게 된다. 그 빛깔은 단일한 푸른색이 아닌 낮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계절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간의 색이기에 말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고려청자는 시간을 머금는 푸른빛, 비색(翡色)”
“고려청자의 빛깔은 시간을 머금는 비색(翡色)”

◐ 고려청자는 모두 알지만 정작 그 특징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고려청자를 설명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을 보면 청자가 오랫동안 연구된 자기 중에 하나라고 한다. 철분이 있는 유약을 높은 온도의 환원염(還元炎: 가마를 밀폐하여 산소의 공급을 최대한 차단하여 높은 온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소성하면 고유의 푸른 색을 띄게 된다. 송나라 때 이미 기술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다.

한국은 고려청자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에 주로 제작되었으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강진과 부안군 일대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렇게 시작된 고려청자는 12세기에 이미 독자성을 띄기 시작하며, 빛을 발하기 시작한 시대가 13-14세기이다. 송나라에서 쓰인 수중금(袖中錦)이라는 문헌을 보면 ‘천하제일 고려비색 (天下第一 高麗秘色)’이라 하여 고려청자를 천하제일의 청자로 묘사하며 그 품질은 이미 세계 최고로 취급하였다. 고려청자의 독자적인 빛깔만큼 정교한 삼강기법은 또 다른 고려청자의 특징 중, 하나이다. 지역의 흙으로 색을 빚고, 거기에 어울리는 기법을 만들고…그렇게 환경에 맞았고 아름다움을 즐겼던 것이 고려청자이다.

◐ 도예를 제외하고 다른 관심 분야가 있는가?

나무라는 소재를 좋아해서 그런지 나무 작업이면 배우고 싶다. 그 밖에 오래된 것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왠지 오래된 사물을 보면 묘한 끌림이 있다. 골동품도 그렇고 고물상도 그렇고…이런 걸 보는 취미가 있다.

◐ 휴식은 주로 어떻게 보내는가?

지금은 딸이랑 논다 (웃음). 몇 년 전부터 와이프한테서 게임을 배웠는데 중독성이 있다. 예전에는 이런 생활과 습관을 상상도 못했다. 작업을 안 할 때는 접을 줄도 알게 됐다.

◐ 작업하기 전에 자신만의 의례가 있는가?

형식적인 의례보다 추구하는 바는 있다. 환경이 어수선하든 정리되어 있지 않든 마음은 차분해야 한다. 그래서 주로 새벽에 작업한다. 주변 환경이 난장판이어도 새벽의 고요함은 나를 차분하게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 뭐, 전시가 코앞이면 낮에도 작업하지만 어느새 인상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 관객 혹은 소비자들에게 나의 작업이 어떻게 전달되었으면 하는가?

특별한 것은 없다. 단지 도자기를 대할 때 ‘왜 이렇게 했을까’하는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은 있다. 생각하는 사람의 작업에는 시대와 의도가 담긴다. 송나라 도자기의 그림은 물 근처에서 흔히 보이는 것들이 장식으로 새겨졌다. 당시의 요(窯)는 주로 바닷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저 무의미해 보이는 비행기나 빌딩도 ‘우리의 시대’를 담을 수 있는 장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통은 오늘을 소홀히 하고 과거의 답습만 이어간다. 그 점이 늘 아쉽다.

◐ 작가님은 매우 정교한 전통의 청자 같지만 현대적인 느낌도 있다.

그게 아마 청자의 질감 때문일거다. 정교함을 특별히 추구하지는 않지만 청자를 보면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변화를 주고 싶다. 기존에 대해 의심없이 답습만 하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형태, 색감, 질감, 그림 등 선 하나만 빠져도 어색해지는게 전통이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쳐 이루어 낸 데이터가 전통이다.

‘오늘을 담는 것’이 현대의 정의라면 전통에 현대를 가미하는 것은 데이터에 대한 도전이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온 청자에 변화를 가하면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형태에서 오기보다 의식(意識)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조금씩, 유약도 바꿔 보고, 흙의 성질도 바꾸면서 티나지않게 변화를 주면서 ‘전통의 의식’에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익숙하고 편안함은 안락함을 주지만 더 이상 보지 않게 된다. 반면, 아슬아슬하고 위험성을 넣으면 인식이 생기고 친해질 계기를 준다. 그렇게 손잡이를 편하지 않게 자르고, 흠집을 남기고, 날카로운 부분들을 남기면서 인식을 일으키고자 한다.

“아슬아슬함과 위험은 인식과 친해질 계기를 준다”

◐ 그렇다면 작가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우리의 오늘’은 어떠한 것이 있는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속에 나의 정서가 있다. 그래서 나를 살피는 것은 시대를 보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도약을 통해 너무 많은 새로움과 변화를 맞이했다. 절차를 밟지 않고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하나 밟을 필요가 있다. 하나하나 밟는 게 중요하다.

도약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정체되어 있고 죽어있는듯한 현세에 상처나 일그러짐으로 나의 의도를 표출한다. 인식 없이 답습만 하는 오늘에 흠집과 찌그러짐으로 생각의 여지를 담는다.

“나를 살피는 것은 시대를 보는 것”

◐ 4월 30일, 밪◐에서 전시하는 포인트는 무엇인가?

순수예술은 그냥 자유롭게 표출하면 되지만 도자기는 기(器)라는 도구의 특성상 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걸 선택하고 안 하고의 폭이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틈새에 개성이 있다. 미세한 것이 좋으냐, 대범한 것이 좋으냐…범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 시도에서 오는 감동의 결은 동일하다. 이 ‘틈새의 놀이’를 펼치지 않을까 싶다.

“도예의 개성은 틈새에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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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유산의 흙과 잎

마유산의 흙과 잎

우연에 의한 여운, 간직하고 싶은 기억

마유산의 흙과 잎

임수정.왕혜원

Ivoryandgray


인터뷰/사진. 김일다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속해있는 환경과 무리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도시라는 이미지가 생성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미지도 만들어진다. 일괄적인 회색의 이미지도 있겠지만 그 회색을 뚫는 시크하고, 도도하고, 스타일리시한 컬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패션을 전공한 임수정 작가와 건축을 전공한 왕혜원 작가. 그 둘이 함께 하는 ‘아이보리앤그레이(Ivory & Gray)는 가장 도시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그런 둘이 산책을 통해 자연을 만난 이야기가 4월 10일 밪◐에서 펼쳐진다.

임수정

◐ 어렸을 때는 어떤 아이였는가?

눈에 띄지 않고, 수줍음이 많았지만 먹을 것만 주면 조용했다고 한다 (웃음).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집에 큰 걱정을 끼치는 타입은 아니었다. 개성이 두드러진 성향은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 다녔던 미술학원의 분위기가 좋아서 줄곧 다녔었다. 그런 연으로 예체능 학교로 까지 이어졌다. 조용한 편이었지만 엉뚱한 면도 많았다. 고등학교때는 친구 7명과 ‘모험에 산다’는 모토아래 실험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고, 고3 때는 들국화에 빠져 펑키한 자유로움을 내면에서 발산하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도 조용히 지내는 것을 선호했다. 집을 그렇게 좋아했다. 멍때리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서 갖은 상상을 하며 보냈지만 딱히 은둔형은 아니었다. 뭔가 궁금한 것이 있거나 보고 싶은 것이 생기면 꼭 찾아 다녔다.

◐ 전공이 패션이었는데 그 시작점은?

고등학교 때 확실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학교 일로 가게 된 공연에서 살풀이춤을 보게 되었다.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무용수들의 움직임도 움직이지만 무엇보다 손끝에서 하늘거리는 하얀 천의 움직임에 매료되었다. 천의 움직임을 보고 패션. 정확히는 패브릭이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자 곧바로 패션 전공을 위한 입시를 준비했다.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뭔가 내 안에 사로잡히는 것이 생기면 움직임은 즉각적이었다. 그렇게 전공을 하게 되었다.

◐ 대학교를 졸업하고 6년 정도 옷 가게를 한 걸로 알고 있다.

대학교 4학년 수업 중, 지옥의 과제가 하나 있었다. ‘나만의 브랜드 만들기’. 브랜드를 만들려면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문득 안데르센동화에 나오는 나무신령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옷을 만드니 옷신령이라고 하면 되겠다고 (웃음).

그때나 지금이나 이름이 다소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Giorgio Armani) 같은 검은 옷과 이국적인 심플함이 대세였던 터라 뭔가 한국적인 것을 하고싶었었다. 졸업 후, 이대 뒷골목에 과제였던 그 이름 그대로 ‘옷신령’이라는 가게를 냈다. 후에 가게가 있던 그 길은 ‘옷신령골목’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 어떤 느낌의 옷가게 였는가?

어렸을 때는 조용한 성격이다 보니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마음과 입을 닫았다. 그렇게 내 안에 폐쇄의 성(城)을 짓고 있었다.

반면 일을 하면서 또 다른 나를 알게 되었는데 조직적인 시스템에서 단계적으로 밟는 것을 좋아하는 나였다. 그래서 단계적이지 않은 ‘대충과 설렁’을 보면 뚜껑이 열렸다 (웃음). 회사 생활이 좀 화나는 일이 많아야지…(웃음) 화가 잦았지만 속은 기막히게 시원했다. 무슨 이중적인 자아도 아니고 그렇게 회사 생활은 너무나 상반된 자아를 애써 끌고 가고 있었다.

2016년부터 중국 항저우에서 일을 하면서 걷는 일이 많아졌는데 그 덕에 많이 차분해진 것 같다. 화를 낸다는 행위와 감정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갖게 되면서 그게 미숙해 보였다. 사는 건, 걷는 것과 같다. 빠르면 버겁고, 느리면 답답해진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자신의 속도를 찾고 걷는 것이다. 좋을 때도, 힘들 때도, 걱정이 많을 때도, 생각이 없을 때도 걸으면서 다시 나를 정화해 나간 것 같다. 지금은 다시 어린애로 돌아가고 있는 듯 하다.

“사는 것은 걷는 것, 걸으며 다시 나를 되밟는다”

◐ 나라는 사람을 자신이 정의해본다면?

호기심이 많은 사람. 호기심이 나를 지탱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걷는 것도 주변을 관찰하며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다. 인스타그램도 산책과 같다. 호기심과 나를 자극하는 것에 움직이며 찾아가는 것처럼. 모르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의 설렘. 어찌 보면 결국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된다. 음식이든, 작품이든, 공간이든 끌림은 그 매개체가 되나 그 끝은 결국 누가 만들었는지 사람을 보게 된다.

“호기심의 끝은 결국 사람이다”

◐ 현재 작업의 주된 주제는 ‘불안정’이다. 그 이유는?

작업을 하면서 자주 보게 되는 면이다. 잎을 숙성하는 과정과 배색을 할 때, 아무리 그 과정이 동일하더라도 결과는 그렇지 않다. 잎을 보고 예쁘게 나오겠다 싶으면 어둠을 보여주고, 반신반의하면 예쁜 색을 내기도 한다. 감은 있지만 그 때 그때의 상태가 좌우한다. 그 과정을 반복하다 자연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불안정이 기반 될 때 안정을 알게 된다. 모든 과정에서 자연적 공법을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타닌분말을 사용하면 통제된 기대치를 이끌 수 있으나 숨이 막힌다.

“불안정에서 안정을 읽는다”

◐ 자연적 공법을 유지하는 이유는?

늙어 죽을 때까지 하려면 몸이 건강해야 하며, 건강한 몸을 위해서는 건강한 소재를 사용해야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한 친환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소재를 직접 만지고 그 과정에서 호흡하는 나를 위해서다. 아, 빡오(키우는 강아지)를 위해서도 (웃음).

◐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내추럴 프린팅 패브릭, 염색 프린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잎이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그래서 잎사귀한테는 “너희들의 사생활을 말해줘”라 하고, 천에게는 “잘 그리게 해줘”라는 말을 하곤 한다. 잎과 천에게 아이처럼 말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안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웃음). 연하고 약한 잎으로 ‘제대로 한번 내 봐야지’하면 예상 못한 아주 어두운 색으로 나올 때가 있다. 내가 기대하던 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안정한 상태를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나도 변해간다. 원단을 만들고, 삶고, 숙성 시키고, 말리고 하는 모든 일체의 과정이 이 친구들과 소통하는 과정이다. 정밀한 과정이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 주체가 잎이며, 그들의 이야기가 천에 담긴다고 생각된다. 잎이 그림을 그리니 리비스드로잉 (Leaf’s Drawing)이 가장 적합한 표현이지 않을까 싶다.

“잎과 천이 담아내는 이야기, Leaf’s Drawing”

◐ 작업의 공정과정을 간단히 설명해달라.

잎으로 작업한다고 모든 잎사귀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유칼립투스나 녹차 및 야생화와 같이, 타닌 (Tannin)이 많은 잎사귀를 필요로 한다. 간단히 말하면 타닌이 많은 잎사귀와 패브릭이 잘 연결될 수 있도록 바인딩(연결)하는 작업이다. 잎사귀는 보통 녹색이지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컬러는 다양하다. 내재되어 있는 미네랄 등 다양한 성분에 따라 드러내는 색은 가지 각색이다. 그 색을 위해 숙성을 시키고, 발효를 시키며 물과 열을 필요로 한다.

외국에서는 그 과정에서 기계압축스팀기를 사용하는데 나는 그게 무섭다. 집에서 편하게 요리 하듯, 일상의 범위 안에서 처리하고 만들고 싶었다. 행위 자체가 하나의 힐링과정이기에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천도 동물성 천이 아닌 식물성 천을 지향하는 편이다. 양털과 같은 동물성 천을 사용하면 잎이 쉽게 물드는 것에 반에 면처럼 식물성 천에 작업하면 변수가 많아 나의 개입이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배색 되는 과정에서 동물성 성질이 있는 계란껍데기를 사용하나 모두 자연 소재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가 통제하며 개입하는 것보다 잎이 주체적으로 그려줬을 때 많은 교감을 갖게 된다.

“작업 과정은 소재를 주체로 끌어내어 교감한다”

◐ 이 소재의 매력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소재가 있다. 하나가 천이다. 패션을 했을 때도, 작업을 할 때도 천을 만졌을 때의 느낌이 있다. 힘들었을 때 마치 나를 감싸 안아주는 듯한 느낌. 소재의 특성상 터치가 많다 보니 소재와의 교감을 통해 형태를 만들어 갔다.

둘째는 잎이다. 잎은 나를 크게 변화시켜준 산책과의 교감이다. 걸으면서 하루의 변화를, 계절의 변화를 무엇보다 나의 변화를 지켜 볼 수 있었다. 그 운명적 산책에서 익숙한 만남이 바로 잎이었다.

“나를 안아주고, 나를 변화시킨 천과 잎”

◐ 자연의 소재는 변수가 많다. 작업하면서 그러한 경험이 있었는가?

색을 조절하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다. 말리기도 하고 때로는 식초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 과정에서 따뜻해지면 썩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썩으면 실패라고 생각됐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썩음과 실패가 달리 보이며 예쁘게 다가왔다. 안정적인 과정이 아닌 엇나간 불안정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이다. 자연의 소재는 내 눈을, 내 생각을, 그리고 나를 변화시킨다.

“불안정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 변화”

◐ 초기와 지금의 작업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초기에는 일해 왔던 습성이 강하게 남아 있던 터라 날염이나 염색이라 생각하며 통제된 과정에서의 선명함을 추구했다. 그래서 초기에 프린트된 나뭇잎은 모두 선명한 편이다. 반면 지금은 자연이 주는 변화와 교감하고 있다. 그래서 변수들을 통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잎들의 경계가 흐리고 일체된 색들보다 변색된 색이 많아지고 있다. 어쩌면 교감의 매개체가 패브릭일 수도 있겠지만 나를 투영하며 관찰하는 것 같다. 변수를 맞이하고 변화를 지켜보는 나의 상태를 보는 즐거움이다. 그러면서 나의 성격을 완화시키는? (웃음)

“변수를 맞이하고 변화를 지켜 보는 즐거움”

◐ 빵과 함께 전시공간이 꾸며져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거의 매일 빵을 굽는 편인데 작업 하는 날은 어김 없이 사워도우를 만들었다. 늘 하던 습관이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빵을 굽는 것과 작업을 하는 과정의 유사성을 느꼈다. 둘 다 발효의 과정이 그렇고 아름다운 결과물을 위해 정확한 시간과 프로세스를 구현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초기부터 이런 의식(意識)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작업 전에 늘 빵을 반죽하면서 내 손과 머리,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는 나만의 의식(儀式)이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빵과 내 작업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앞으로도 작업을 하는 한 계속해서 빵을 만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빵이 전시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 4월 10일에 선보이게 될 밪◐에서의 전시 포인트는?

예쁨. 사람들이 예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표면적인 예쁨은 물론 작업의 자연적 소재가 갖고 있는 불안정한 요소까지. 이 모든 것이 종합적인 예쁨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불안정을 마주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불안정의 아름다움을 마주하였으면”

왕혜원

◐ 어떤 성장기를 통해 오늘까지 왔는가?

유치원 때였나?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하면 내가 좋아하는 스토리로 각색하여 지어 내곤 했다. 보기에 따라 창의적일 수도,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거짓과 공상의 애매한 경계 사이에서 어느 날 어른에게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라 그게 상처로 남아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여러 권의 잡지를 만들었음에도 (웃음).

초등학교 때는 공부도 줄곧 했었고 장난끼도 심했었다. 미술을 특히 좋아했는데 초등학교 3학년때 소를 온통 핑크로 채색한 적이 있었다. 애들이 그런 내 그림을 보고 놀리고 심지어 선생님도 뭐라 하시니 화가 나서 그만뒀다. 시대가 고군분투해서 그런지 다름이나 독특함이 존중 받지 못해 그 사이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잘해서 한국영재교육에 뽑혀 특수 교육을 받았었다. 영재였다 (웃음). 반면에 노는 것도 좋아해서 뭔가 갈등이 많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갈등은 사실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원하는 전공과 내가 가고 싶은 전공의 차이가 있었으나 결국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하는 전공을 했다고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뭔가 그때는 방황의 연속이었기에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으나 끊임없는 부모님의 설득 끝에 학교는 무사히 잘 마쳤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부모님 의견을 따르기를 잘 한 것 같다.

그렇게 무사히 한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전공으로 다시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고 회사 생활도 하게 되었다. 꽤 이름 있는 건축회사에서 일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시야도 많이 넓어졌다. 그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하고 싶은 공부도 해보고 재미있는 일도 하면서 ‘막연히 하고 싶은 일’들을 경험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나날 중, 당대 인테리어디자인의 양대 산맥 중 하나였던 제프리비얼스 (Jeffery Beers)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분과의 인연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이 뮤즈아키텍츠 (Muse Architects)였다.

기존과 다른 방식의 접근을 선보이던 회사였는데 거기에서 경험을 쌓으며 그때부터 내가 뭘 하고 싶은 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공간’이었다. 그런 경험을 안고 한국에 돌아와 대기업의 소위 부장이라는 타이틀도 달고 일을 하였지만 참 쉽지 않았다. 그래서 관뒀다. 그러나 생각보다 내가 받은 상처가 심해 우선은 회복이 필요했다. 그 상처가 무기력으로 드리우며 1년은 생각도 안 나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런 시절 수정이가 책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와 우연찮게 책을 쓰기 시작했다. 소소한 개인 출판사도 만들어서 말이다. 격월로 10권의 잡지를 냈고 조금씩 수입도 들어오니 숨통도 트이고 자신감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중국에서 건축 일의 오퍼가 들어왔고, 서서히 기력도 회복하면서 나만의 언어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방향을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 간다는 것은 나의 언어를 알아가는 것”

◐ 만들었던 잡지는 어떤 잡지였는가?

일종의 비쥬얼 다이어리 같은 것이었다. 처음 몇 권은 스스로도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냥 만들었다. 그런데 가끔 방향도 모르면서 향해가 가능한 추진력은 쌓이면서 방향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이 그러했다. 8, 9권 째부터 스스로도 편해지며 내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는 내가 편해지니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끼는 것 같다. 그렇게 8권째부터는 일본이나 유럽으로 수출도 되고 하니 조금씩 자신감도 찾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회사를 그만두고 방향도 잃고, 동력도 잃은 나에게 스스로를 다듬고, 정리할 수 있는 매개가 잡지였다.

“때로는 가면서 방향을 깨닫기도 한다”

◐ 언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은 자신만의 언어를 만드는 사람이라 생각된다.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에 깊이를 주는 사람. 그 능력이 없으면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 어렸을 때 많이 노셨다고 하셨는데 주로 어느 클럽에 출두하셨나 (웃음)?

너무 옛날 이야긴데…(웃음) 월팝이나 유니콘, 줄리아나 같은 곳에서 놀았다 (웃음). 당시에 뉴월드호텔의 ‘단코’라는 클럽이 있었는데 거기가 아무래도 ‘한국의 부킹’문화가 처음 생성된 곳이 아닐까 한다. 이거 누가 기록해야 돼 (웃음). 이 버릇은 뉴욕 가서도 이어졌는데 ‘뉴욕킹’이며 계속해서 클럽에서 원 없이 놀았다 (웃음).

◐ 어렸을 때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른가?

어렸을 때는 편하게 사람들과 어울렸던 반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무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뉴욕에서의 15년 그리고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끊임 없이 스스로를 방어 해야만 했던 환경이었다. 그 생활을 접다 보니 다시금 나를 찾은 것 같다.

◐ 전공은 어떤 연유로 시작하게 되었는가?

하고 싶은 것과 실제로 선택하는 전공이 꼭 일치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일치될 필요도 없다. 사실 동기보다 중요한 게 지속성이지 않는가. 그런 의미로 처음 대학은 화학과를 갔지만 곧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재수를 하고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사실 패션과 인테리어 사이의 선택이 있었는데 머리가 나쁘지 않았음에도 (웃음) 이상하게 옷 패턴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반면에 공간은 직관적으로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선택한 전공임에도 여전히 물음표는 남아 있었는데 배낭여행을 하면서 생각의 전환이 왔다. 유럽의 여러 건축물들을 보면서 전공의 애착과 함께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 하시는 일은 책도 쓰시고 작업도 하시고 다양한 것 같다. 지금의 행보를 정리해보자면?

직업적인 전공은 인테리어 디자인이며 좀 더 세분화시키자면 건축의장 (Architectural Design)이다. 건물 완성을 위한 기술적이고 행정적인 일이 아닌, 도식적인(schematic) 디자인으로서 입체적인 공간감, 소재 그리고 공간의 쓰임을 생각하는 디자인이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공간은 내 관심사에서 빠질 수 없다. 작은 물건을 만들더라도, 책을 쓰더라도 결국은 그 것을 통해 공간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관심이란 그때 그때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눈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게 된다. 때에 따라 공간일 수도, 물건일 수도, 자연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전공과 주변환경, 그리고 변화된 관점들이 모두 합쳐져서 가장 자연적인 언어로 풀고 싶은 게 나의 주된 관심사인 것 같다. 마음속에 있던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체적인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태와 언어로 들어내고 싶다.

“나의 환경, 상황, 변화가 섞여 관심의 언어가 된다”

◐ 전공이 건축인 만큼 공간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요소인 것 같다.

전시회는 작품과 보는 사람들이 소통하는 공간이다. 작가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이상 전시공간에 작품이 놓이면 사실상 역할은 다 하게 된다. 그러나 뷰어(Viewer)와 작품과의 만남은 넓게 보면 여기까지 오는 과정. 좁게 보면 밪◐의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입구와 공간 그리고 주변환경은 모두 작품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렇게 배치를 생각하고, 그리고, 만들고, 꾸며진 공간과 뷰어의 호기심 어린 관심이 연결되어 좋은 관계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 지금 하고 계신 작업을 간단히 설명해달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속에서의 자연은 오묘하다. 그 속에서 산책하며 주어 온 나뭇가지와 흙 혹은 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달걀껍질 등 흔히 접할 수 있는 자연의 요소들을 점토(Wood Clay)와 혼합하여 만든 큐브 형태의 작업이다.

자연 속의 자연이든, 도시 속의 자연이든 모든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 속에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체감을 우리는 익혀간다. 내가 놓쳤던 다른 자연. 돌처럼 보이기도 하고 메주처럼 보이기도 하고 (웃음). 그게 어떠한 느낌이든 자연이 자연 같지 않은 이질감과 모순적 감각이 흥미롭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육면체의 작업물이 자연스러운 대기 속에서 구워지는 ‘에어베이킹 (Air Baking)’ 이 이번 전시에서 보여질 예정이다.

“Air Baking, 내 방식으로 구워진 자연”

◐ 자연의 소재는 변수가 많다. 작업하면서 소재의 흥미로운 점이 있었는가?

가끔 내 손을 찌르는 것? (웃음).

◐ 4월 10일에 선보이게 될 밪◐에서의 전시 포인트는?

호기심, 좋은 라이프 방향.


Ivory & Gray

◐ ‘아이보리 앤 그레이’는 임수정작가와 양혜원작가의 협업 혹은 작업공간이다. 둘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왕혜원: 우리는 대학 동창이다. 수정이는 말랐지만 키가 컸고, 조용했지만 전인권이나 강산에 음악에 빠져 있던 독특한 친구였다. 매력적이었지만 딱히 맞는 친구는 아니었다 (웃음).

임수정: 혜원이는 눈매가 아주 강했고 리더십이 있었다. 학교 과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기억은 맨날 클럽만 갔던 친구로 기억되고 있다 (웃음).

양혜원: 대학교 때 청와대 주변에서 우리 둘이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가 아마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임수정: 학교를 졸업하고 혜원이가 먼저 뉴욕으로 갔다. 학교 때도 막 친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친구였기에 뉴욕에 가서 연락을 했다. 그런데 혜원이가 연락을 잘 안해 살짝 삐쳤었다 (웃음). 그래서 같은 시간에 뉴욕에 머물렀음에도 서로 자주 연락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각자 한국에 정착하고 있을 즈음 연락이 되어, 다시 보게 되었다. 어렸을 때 함께 보낸 인연은 오래 지나도 그렇지 않은가? 반가우면서 짠함이 있다. 아마 세월이 읽히고 그 읽힘에서 여러가지 복잡한 것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연은 알 수 없는 시기에 만나고 또 만들어지기도 한다.

왕혜원: 서로 다른 듯 비슷한 면이 호기심이 발동되면 추진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서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작업을 같이 하고 싶은 욕구는 같았다. 그렇게 2010년부터 상표등록만 10건이 넘었을 거다 (웃음). 술 마시다 의견이 일치되면 ‘내일 등록하자!’하면서 하고 (웃음). 둘 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며 ‘아이보리 앤 그레이’라는 명칭은 작년에 만들었다.

“인연은 알 수 없는 시기에 만나고 또 만들어진다”

◐ 서로 어떤 교감과 영향을 주고 받는가?

왕혜원: 나는 내 의견을 빼는 편이라면 임수정작가는 관철시키는 타입이다 (웃음).

임수정: 나를 독선적이라 모함하지만 관철 시키는 편이긴 하다(웃음). 그러나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서로의 합이 맞…그렇게 믿는다 (웃음).

왕혜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서로 합이 잘 맞기에 가능하다. 우리 둘이 공통적으로 매개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음식과 문화다. 이를 통해 공감하고, 교감하며, 공감하는 듯 하다. 그래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임수정: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우리 둘 다, 다시 한국에서 정착을 하기 시작한 시점에 혜원이가 식사를 대접해 준 적이 있었다. 우리 집안은 간이 쌔고 감칠맛 위주의 음식인 것에 반해, 혜원이는 집안이 이북이라 그런지 대체로 음식이 슴슴한 편이었다. 대접은 그냥 일상에서 밥을 사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 있다. 뭔가 상대를 좀 더 생각하고 배려 하는 느낌이 있다. 그렇게 대접 받은 음식을 통해 당시의 혜원이를 이해하고 우리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음식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기도 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하기도 한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음식 본연의 맛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렇게 음식의 취향도 변해 갔다.

“음식과 문화는 우리를 이어주는 교감의 매개”

◐ 2016년부터 중국 항저우와 인연이 있으신데 어떤 일을 하는가?

우연히 지인을 통해 항저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항저우는 실크의 메카인 만큼 패션의 도시이자 중국내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제일 먼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패션과 문화를 테스트 하는 거대한 랩과 같다.

중국의 패션시스템은 유럽과 유사하여 매장 중심의 성장보다 패션쇼를 하고 수주를 받는 형식이다. 그래서 쇼의 공간, 의상, 컨셉 및 교육과 관련하여 컨설팅을 하고 있다.

◐ 일로 인연을 맺었지만 항저우의 영향이 많았던 것 같다.

뿌연 매연을 뚫고 솟아 오른 건물들은 더 이상 이상적인 도시의 이미지라기보다, 역설적이게도 발전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항저우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도시와 자연의 조화이다. 그 동안 경험해 온 도시에서는 사람들을 덜 접촉하며 빠르게 이동해 왔다면 항저우에서는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환경이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느리고, 수줍고 순하다. 무엇보다 음식이…너무 맛있다 (웃음). 개인적으로도 비즈니스적으로도 많은 경험과 발전이 있었던 곳이 항저우다.

◐ ‘아이보리 앤 그레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50년 넘게 한 집에서 70종의 채소와 50종의 과일을 재배하며 자연과의 공존을 꿈꾸는 아름다운 노부부의 이야기, ‘인생후르츠’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우리에겐 인생 영화이다. 그 노부부가 입던 옷 중에 아이보리와 그레이가 있었는데 너무 예뻐 보였다.

어느 날, 우리가 함께 작업실을 열고 어떤 이름을 지을까…고민하고 있을 때, 문득 이 옷이 생각났다. 왠지 모르게 우리에게 그 옷과 그 옷의 색. 그리고 그 옷을 입은 노부부와 그들의 가치관이 여기에 다 스며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이보리와 그레이는 뭔지 모르게 시간이 흘러 변색된 빛깔. 그래서 시간의 축적을 은유적으로 이야기 해주는 것 같았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우리 작업의 많은 부분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빛 바랜 색은 아름다운 세월의 빛이다”

◐ 그렇다면 ‘아이보리 앤 그레이’는 어떤 공간인가?

80세까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공간? (웃음).

◐ 전시 타이틀이 ‘마유산의 잎과 흙’이다. 그 연유는?

전시를 계획하면서 바람도 쐴 겸, 산책도 할 겸 가평과 양평 쪽을 유유히 돌아다니다 유명산부근에서 길을 잃어버려 ‘마유로’라는 생소한 길에 다다랐다. 처음 오는 길이었지만 덕분에 그 부근의 산세를 모두 둘러볼 수 있었는데 돌아와서도 그 아름다움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산세도 산세이지만 이름이 예뻐 그 연유를 찾아 보니 유명산이 예전에는 마유산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산 정상에서 말을 키워서 생긴 이름이다. 그때의 산의 능선, 컬러와 텍스츄어 등이 고스란히 영감이 되어 작업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한 사람은 마유산의 흙을, 다른 한 사람은 마유산의 잎을.

“우연에 의한 여운, 간직하고 싶은 기억”

OUTRO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멈춰버린 그들의 걸음이 걷기를 통해 인지하지 못했던 자연에 눈이 가게 된 시점의 이야기. 자연을 만나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도시에서 애써 감춰왔던 수줍고, 긴장하는 모습을 인터뷰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다듬으려 하지않고 나이브한 모습에서 외부에 귀기울리던 그들이 지금은 자신의 내면을 대면하고 있었다. 도시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기에, 그들의 지금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산책을 통해, 자연을 통해 한 챕터를 접고 다음 챕터를 향하는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담긴 전시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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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자전

고백자전 古白瓷展

다름은 이질(異質)이 아닌 다른 시각

고백자전

홍두현

Hong Doo Hyun


인터뷰/사진. 김일다

동서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청도는 지형의 대부분이 험난한 산으로 둘러싸여 (청도천과 동창천인) 강을 기반으로 대부분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자연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다. 1969년 이 지역 마을 주민들의 수해 복구하는 모습에 영감을 얻어 탄생된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이자 소싸움과 감(반시)이 유명하다 보니 뭔가 정겹고 시골스럽다. 그래서인지 청도에는 고속버스가 없다. 이런 시골스러운 풍경 남산 아래, 홍두현 작가의 반월요가 위치해 있다.

자연 속에 있는 건축물과 작은 가마(窯)를 보면서 그의 현대적인 감성과 실용적인 성향을 유추할 수 있었다. 곧 찻집으로 오픈할 예정이라는 현대적인 건축물에서 말차를 한 잔 내어주며 그의 이야기를 풀어 주었다.

◐ 1. 어떠한 연유로 도예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작가님에게 도예의 매력과 의의는 무엇인가?

아이스하키에 빠져 딱히 공부를 하고 있지 않던 중학교 시절, 부모님이 호프집을 하고 계셨다. 호프집 맞은 편 도예 공방이 있었고 그 공방선생님이 호프집 단골이었다 (웃음). 호프집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자녀를 걱정하는 학부모와 공방선생님으로 바뀌면서 나를 공방에 데려가신 거다(웃음).

근데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학원을 안 가서 좋았고, 공부 못해도 뭐라고 안 해서 좋았다.

도자기는 도제식 교육이다. 제자는 스승 밑에서 일정 기간 수련을 해야해서 공방에서 먹고 자고 하며 생활했다. 근데 이게 계속 할 것 같다는 촉이 왔다. 하면 할수록 목표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목표의 연결고리들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었다.

도예의 의의 혹은 도예의 의미를 딱히 두는 것 같지는 않다. 단지 도예는 어렵지만 재미 있고, 손님들이 좋아하면 보람도 있고…티는 못 내지만 속으로는 좋아한다 (웃음). 그런 면에서 보람과 관종은 한 끗 차이인 것 같다 (웃음).

◐ 2. 도자기를 하면서 큰 변화의 길목이 있었을 것 같다. 그 변화가 작가님에게 미친 영향은?⠀

변화의 길목을 설명하기에 앞서 어느 시점부터 나의 발자취가 시작되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반월요’를 청도로 옮긴 2013년이 그 시작점이지 않을까 한다. 그 전 여러 스승님과 일본에서 배운 모든 경험은 수련의 과정이었던 것 같고.

약 5년의 일본수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일단 일본에서 공부한 걸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1-2년을 보냈다. 그러니 정확히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한다기보다, 그냥 해왔던 것을 답습하던…어쩌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기에 닥치는 대로 했던 시기였다.

일본에 있을 때에는 멋진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지 달항아리라던가 다도구라는 어떠한 구체적인 생각이 깃들지는 못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중국을 가게 되었고 이것저것 다 만들던 시기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내 작업이 제법 팔렸다. 특히, 다도구들이 잘 팔렸기에 2,3년 동안은 다기의 기류가 형성되었다. 물론 시장의 흐름도 있었고.

교류와 만남이 있다 보면 자연히 영향을 받고 깨닫게 되는 부분들이 생긴다. 중국에서 그 날도 어김없이 작품을 팔고 있던 전시 마지막 즈음, 몇 번 내 작품을 눈보던 중국분이 10개를 한번에 구매해 주셨난데, 그 인연을 계기로 그 후 10개가 아닌,1,000개의 물량으로 주문제작을 요청하신다. 딱히 중국에서 판매하시지도 않는 것 같은데...(웃음). 무슨 인연인지 몰라도 그 주문 덕에 알게 모르게 내 기술과 한계치는 계속 발전해 왔다. 이후, 여러 나라의 다인들을 만나고 교류하면서 그들의 생각과 철학을 경청하게 되고 많은 생각의 여운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의 장점이 무엇이며, 한국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한 부분을 잘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이 더욱 커진 요즘이다.

◐ 3.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마을인 비젠(備前)과 미노(美濃)에서 공부하였는데 일본의 도예는 어땠는가?

2008년에서 2013년까지의 일본생활은 ‘장인정신’이란 무엇인지, 생각의 차이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시기였다.

그릇의 이가 나가거나 삐뚤삐뚤한 건 그저 불량이라고 치부하던 당시, 생각을 다르게 하면 관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갖게 한 셈이다. '단점은 꼭 단점이 아니다’라는 가치관과 감성을 갖게 해주었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투박하고 조용한 일본의 미의식인 와비사비(わびさび). 차분하고 조용한 일본의 정원, 단 한 송이만 꽂혀 있던 다도실의 꽃병, 절에 있던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진 모래 긁는 도구 등. 모든 게 자연스러운 듯 연출된 일본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서 어울리는 그릇들. 계절과 환경에 맞추어 변상하는 연출. 각 계절에 맞게 집안의 인테리어를 바꾸고 겨울에는 일부러 도자기를 두툼하게 만들고 따뜻한 분청으로 제작하면서 주변환경과 계절에 따라 작품을 미세하게 달리한다. 이 섬세한 감성을 크게 배운 것 같다.

“단점은 단점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계절에 따라 다른 두께의 도자기”

◐ 4. 일본에서 공부하였지만 한국적인 것을 만들고 싶은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갤러리 ‘한’이란 곳이 있었다. 스승님의 전시로 함께 갔었는데 거기서 본 계룡산 주병에 약간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국 사람임에도 몰라본 나의 무지함과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강렬함으로 복잡미묘한 감동에 휩싸였었다.

일본에 갔다오면 으레 일본적인 것을 하고 싶어 할거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오히려 ‘일본에서 보았던 한국적인 것’을 하고 싶었다. 우리나라에 있으면 한국적인 통념에 가로막혀 경험하지 못할 요소들을 다른 관념으로 적용하여 새로이 해석하는 거다.

그 예로 일본에서는 튀김이 한국 재기에 올라온다. 한국적 관념이라면 재기는 제사상에만 나와야 하지만 시각을 달리 하면 용도도 다양해지고 거기에 알맞은 디자인도 무궁무진 해진다. 이렇듯 일본에서 느낀 감성과 영감으로 한국적인 도자기를 다른 발상으로 만들고 싶다.

"다름은 이질(異質)이 아닌 다른 시각”

◐ 5. 작가님은 어떠한 성격이라고 생각되는가?

대체로 앞과 뒤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생활과 작업은 조금 다르다. 생활은 포기하는 것들이 조금씩 생기지만 작업은 완성이라는 일념 하에 집착에 가까울 때가 있다.

그리고 곧 40을 앞두는 나이임에도 다기를 하는 작가 중 막내다. 다기 쪽은 작가로 알려진 세대와 그 중간이 없이 바로 갓 졸업한 학생들이다. 그래서 늘 모임에 가면 애매한 나이인 내가 막내다 (웃음). 그런데 이게 좋다. 어디든 막내처럼 편하게 물을 수 있고 눈치 없이 도전할 수 있다.

◐ 6. 본인의 작업특징을 본인이 정의해본다면?

모든 사람 입맛에 맞고, 싫은 소리 안 듣고, 사랑받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었다 (웃음). 이렇게 말하면 모두 웃겠지만 마음은 솔직히 그랬다. 그런 생각이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깨닫게 된 바가 있다.

예전에는 한쪽으로만 전진하는 사람을 보면 솔직히 바보 같았다. 뭔가 외골수처럼 주변 환경과 흐름을 보지 않고 고집스럽게 작업하는 그런 사람. 10년 전에 알던 그런 바보 같은 작가를 10년이 지난 지금 보면 어느새 감동과 자극으로 올 때가 있다. 그러면 본인만의 특징과 색깔이란 무엇인지… 많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지금은 냉정히 나를 관찰하고 더 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근래 내 작업을 사신 분께서 ‘두고두고 보니 좋아 보인다’는 말을 하신다 (웃음). 어떤 부분들을 만들면서 사람들이 과연 이 부분의 요 맛을 알까 하며 작업을 하는 거만함도 있지만 또 그걸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 때 기분이 좋다. 나도 모르는 나의 특징을 사람들이 알아볼 때, 가장 즐겁다.

“바보 같은 고집이 고유의 색을 만든다”

◐ 7. 나의 작업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는가?

자주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집안에 수많은 식기류들이 있겠지만 보통 자주 쓰는 건 몇 개 안 된다. 매번 쓰는 것만 쓴다. 그리고 중요한 손님이 올 때도 늘 내던 것을 내게 된다. 예뻐서 바로 구매로 이어져도 좋겠지만 두고두고 자주 사용되는 몇 안 되는 물건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 8. 근래 작품은 주로 백자가 많은데 그 이유는?

이전에 많은 소재와 다양한 용도의 작업들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백자는 다양한 측면으로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공예품이든 예술품이든 백자의 품위는 한결같으며 기능적 측면으로도 차와 잘 맞다. 그래서 작업의 중심으로 두고 싶었다.

◐ 9. 청도는 어떤 연유로 오게 되었는가?

대구 수성구가 고향이다 보니 바로 옆이나 다름없는 청도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반월요의 터를 청도로 생각하였고 2013년에 이쪽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 10. 작업하기 전에 자신만의 의례나 습관이 있는가?

없다.

◐ 11. 밪은 낮과 밤의 합성어이다. 빛과 그림자, 음과 영.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밤과 낮이 있는 일상을 어떻게 보내는가?

비교적 즉흥적으로 하는 편이다. 집중할 때는 집중하며 작업하지만 놀러 가고 싶으면 놀러 가고 하기 싫으면 안 하기도 한다. 흐르는 대로 하는 편이다.

◐ 12. 작업을 하지 않고 쉴 때는 주로 무엇을 하는가?

최대한 아무 생각 안 하려 하지만 가끔 몰아서 사람들에게 안부 전화를 돌린다. 그러면서 주변 친구나 지인들에게 듣게 되는 소식들이 있고, 대화를 나누며 이해되고 정리 되는 것들이 생긴다.

◐ 13. 작업장에서는 보통 어떻게 작업하며 보내는가?

지금은 일주일에 3번 정도 후배가 와서 함께 작업하기도 한다. 각자 작업하다가도 농담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예전에는 계획적인 리스트를 작성하여 하나하나 지우며 작업하였지만 지금은 아침에 좀 생각하고 그것만 작업한다.

리고 예전에는 성형이 마무리된 작업물을 건조대에 올리면 끝이었으나 지금은 또 한 번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반죽하기도 한다. 뭔가 나의 작업을 사람들에게 내 보였을 때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것 같다.

◐ 14. 도예 외에 관심 혹은 다른 분야와의 공동작업을 생각하는 게 있는가?

청도에 계시는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생겨 공부하고 있다. 구상, 비구상 그리고 정물화 등을 좋아하는데 그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작가들의 이야기와 그들만의 세계관을 들으면서 좋은 자극과 영감을 받고 있다.

◐ 15. ◐에서의 전시회 포인트는 무엇인가? 개인에게 있어서 이번 전시회의 의의는?

내 작업이 다양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데 이게 듣기에 따라서는 깊이가 없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런 의문이 싹틀 즈음, 다양한 의견을 통해 하나를 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나에게는 백자였다. 무궁무진한 백자였기에 깊이 파면서 그걸 빚어서 펼쳐 보고 싶었다. 동시에 이번 계기로 내 색을 찾아가며 정리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스스로는 나의 색이 없게 느껴져서 만족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왔는데 그 의문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과 연구를 하고 싶다. 그러한 ‘진행’이 어쩌면 ◐에서의 관람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OUTRO

산 속에 있는 작가들은 왠지 사회와 단절하고 고뇌하는 진부한 이미지가 있지만 홍두현 작가는 오히려 산속 고요함 속에서 사회와 활발히 교류하며 자신을 빚고 있는 느낌이다.

쉬고 싶을 때는 쉬고, 작업하고 싶을 때는 작업한다는 그의 말에서 그의 자유로운 삶과 작업의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하나를 깊게 파고 싶은 바램은 바램 대로 삶은 삶 대로 즐기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분리하며 잘 매진하고 있는 것 같다.

다기를 하는 도예계에서는 막내라 겁 없이 도전할 수 있다는 그의 말처럼 그 만의 방식으로 도예를 대하고 즐기고 있는 그가, 뭔지 모르게 도예계의 다음 세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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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구전 茶道具展

차도구전 茶道具展

작은 것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싶은 단장요

차도구전

강영준

Kang Yeong jun


인터뷰/사진. 김일다

고개 숙인 벼와 까치밥만 남은 감나무.

이 풍경을 보며 달리는 차 안이 포근하게 느껴질 즈음이면 가을이 온 것 같다. 그 가을의 어느 날, 11월 19일에 ◐밪의 전시회를 맞이하게 될 강영준 작가의 단장요를 방문하였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처음 단장요를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마치 가을의 느낌과 비슷한 포근함이었다.

◐ 1. 도자기는 물레 돌리는 모습에 반해 입문하신 걸로 안다. 그때의 느낌은 어땠는가?

어렸을 때였지만 중학교 때부터 ‘미술부’에 있어서 그런지 줄곧 이 계통에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고 조소를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 선배들 작업을 어깨 너머로 보고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나날들 중 어느 날, 선배가 작은 항아리를 만들기 위해 물레를 돌리고 있었는데 묘하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흙이 올라가며 어떠한 형태로 만들어진다는 단순한 행위에 뭔가 모르게 소름이 돋으며 신비롭다는 감정에 휩싸였다. ‘세상에 도자기는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하는 소박한 깨달음이 조소에서 도자기로 옮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여전히 재미가 있다.

◐ 2. ‘단장요’는 어떠한 연유로 밀양에 안착하게 되었는가?

작업실을 알아보던 시절, 스승님의 권유로 사실 통도사 쪽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고향은 부산이고 집사람은 대구인데 밀양이 지리적 요충지로 괜찮겠다 싶었다. 단지 지리적 요인 뿐 아니라 쓰기 좋은 흙도 많았고 토가마의 여건도 좋았으며 이동적 측면에서도 꽤나 괜찮은 위치였다. 그렇게 밀양에 대한 관심이 커지니 밀양이 나를 부르는지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며 2003년부터 안착하게 되었다.

◐ 3. 밀양에는 쓰기 좋은 흙이 많다고 하셨는데 ‘밀양흙’의 매력은 무엇인가?

‘좋은 흙’이란 각자에게 맞는 흙이라고 보면 된다. 밀양의 흙은 황토가 많다. 황토는 보통 화도가 낮은데 반해 밀양의 황토는 카우린 성분이 많고 또 철분도 많아 화도가 높아도 잘 버틴다. 그래서 가마에 불을 때면 일반 황토와 달리 밀양의 황토는 불담이 쎄서 잘 버티고 또 완성됐을 때 오묘한 때깔을 띠게 된다. 또 완성된 도자기를 때리면 쇠 소리가 나며 단단하기에 차를 우렸을 때도 맛이 좋다.

“좋은 흙은 나에게 맞는 흙이다”

◐ 4. 그래서 그런지 ‘단장요’의 분청사기는 분막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분막이 떨어진다고 제품에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분청의 특성상, 오래되면 흙에 따라 떨어지기도 하고 그런데 단장요의 분청사기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밀양의 흙을 사용해서 다른 분청보다 높은 온도로 구워져 더 단단하다.

◐ 5. 스스로 작가님의 성격을 정의하면 어떤 성격이며 작업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

예민한 성격이며 성향상 불필요한걸 싫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작업물도 단순하며 실용적인 측면을 선호하게 된다. 불필요한 장식물 없이 가볍고 쓰기 편한 그런 도자기를 추구하다 보니 아무래도 성격과 닮아 있을 수 밖에 없다.

◐ 6. 본인의 작업특징을 정의해본다면?

최근에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작게 참 잘 만든다’고 (웃음). 스스로도 그쪽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점점 ‘차도구’ 쪽으로 흐르는 것 같다. 작으면서 그 안에 모든 게 포함되는 그런 느낌. 그래서 큰 것보다 작은 거에 애정을 느낀다.

“작은 것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싶은 단장요”

◐ 7. 20년가까이 되는 작가님의 ‘도자기 사(史)’는 어떠한 흐름을 갖고 있는가?

밀양에 내려와서 시작한 첫 작업은 가마를 만드는 일이었다. 3개월을 걸쳐 완성한 가마에 첫 불을 때던 시기가 아마 ‘나의 도자기’ 라고 일컬을 수 있는 시작점이지 않을까 싶다.

그 첫 번째 시기는 나의 도자기가 무엇인지 탐구하던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좋은 추진력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시행착오와 방황의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 와서 보면 형평 없는 작업들이 많았지만 무엇인가에 꽂혀 앞뒤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한 시기였던 것 같다. 다만 이때는 나에게 집중되던 시기라 세상의 흐름과 요구에 귀기울이지 못했다.

이 과정을 걸치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을 만들어야 하는지, 또 주변의 흐름도 살피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나에게 있어서 두 번째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생활자기들은 실제로 어떻게 일상에서 사용되는지, 그리고 다도구는 용도에 따라 어떤 쓰임을 갖는지, 관찰하며 실험하며 나의 기준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단장요의 기반이 잡히기 시작한 시점이다.

세 번째 단계가 3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수 많은 경험이 쌓이다 보니 지식과 기술도 제법 높아져 다양한 차에 맞는 다도구의 제작이 가능해 졌는데, 나에게 부끄럽지 않게 ‘팔아도 덜 미안한 도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시행착오와 실험을 통해 체계를 만들고, 이제서야 서서히 그 결실이 익어가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제서야 쓸 만한 물건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웃음).

“사람들에게 덜 미안한 도구를 만드는 것이 목적”

◐ 8. 디자인적으로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

도자기는 기(器)로써의 기능이 뚜렷하다 보니 ‘보편적 사용경험’이란 틀을 깨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도자기는 작은 변화가 큰 변화가 된다. 둥근 형태에서 사각의 형태로 변화도 꿰차 보고, 덤벙도 해보고, 그림도 넣고, 상감도 해보면서 다양한 변화를 모색해 보고 있다.

특히, 근래는 많은 사람들과 마시던 차문화가 1,2인의 소규모 형태로 바뀌어 가면서 다도구의 크기도 미세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렇게 기존의 고수와 미세한 변화의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

“기(器)는 작은 변화가 큰 변화이다”

◐ 9. 강영준작가 하면 분청사기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분청사기의 매력은 무엇인가?

백자, 청자, 분청 등 여러 장르가 있지만 처음부터 분청사기를 지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문제작을 통해 영향을 받게 되었고 특히 중국고객분들이 분청을 좋아하셨다. 그렇게 요청에 의해 다루다 보니 역으로 분청의 매력을 느끼고 빠지게 되었다.

분청의 가장 큰 매력은 꾸밀 수 있는 여건이 많다는 것이다. 다채로운 빛깔을 표현할 수 있고, 덤벙이라 기법과 그림을 삽입할 수 있으며 완성된 이후에도 다도구는 찻물이 들어 세월에 따른 표현이 깃들 수 있다.

◐ 10. ‘감동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그릇을 만들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작가님에게 그 의미는 어떤 것인가?

내가 만든 물건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닌 사용되어 변해 갔으면 좋겠다. 그 근간은 ‘사용’이다. 도자기는 기(器)이기에 사용되어야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끔 킨츠기로 고객들의 제품을 수리해주기도 하는데 오랫동안 찻물이 고인 제품을 갖고 올 때면 괜스레 흐뭇해진다. 그렇게 쓰임이 있는 그릇을 만들고 일상에 많이 쓰여 생활에 녹아 내리면 좋겠다.

손님들이 내가 만든 차도구를 보면 작고 귀엽다고 좋아할때면 보람과 동시에 다음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이런 즐거움을 계속 주고 싶은 욕심이.

“감동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그릇은 오래 쓰이는 것”

◐ 11. “차는 어떤 흙으로 만든 잔에 마시느냐에 따라 차맛이 달라진다”고 하셨다. 차를 담는 다도구란 무엇인가?

밥공기는 밥을 가장 맛있고 예쁘게 담아내야 하듯 다도구도 마찬가지다.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기(器)이기에 그 흙과 맞는 차가 있고, 쓰임은 잘 우려낸 상태를 잘 담아 내줘야 하며, 차가 아름답게 담겨야 좋은 다도구라 생각된다.

“맛있고 이쁘게 담겨야 좋은 다도구다”

◐ 12. 11월에 하게 될 ◐에서의 전시 포인트는 무엇인가?

가장 맛있게 익은 도구들이 전시 될 것이다.

◐ 13. 작가님의 일상은 어떻게 보내시는가?

여긴 절간과 같은 삶이다 (웃음).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작업장에 오면 9시쯤이다. 11시까지 작업을 하고 점심을 먹으면 오후 22시에서 23시까지 작업을 한다. 거의 반복되는 일상의 패턴이다.

◐ 14. 작업을 하지 않는 휴식은 주로 어떻게 취하시는가?

배드민턴을 친다. 도예를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몸을 수그려 작업을 하기에 몸을 필 수 있는 운동을 하면 좋다.

◐ 15. 자주 듣는 질문이겠지만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는가?

주로 자연과 박물관에서 얻곤 한다. 박물관은 특히 재미 있는 요소들이 많아 자주 가곤 하는데 옛 도자기에서 형태의 영감을, 민화에서 그림 등을 착안하게 된다.

◐ 16. 작업하기 전에 자신만의 의례가 있는가?

가마를 땔 때 ‘가마신’에게 3번의 절을 제하면 작업할 때 특별한 의식이나 의례는 없는 것 같다.


OUTRO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처럼 매서운 눈을 갖고 있는 강영준 작가님의 인상과 달리,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며 조용하고 섬세한 부드러움이 베어난다. 매서운 인상과 달리 작고 귀여운 작업이 좋다는 이야기를 하며 미소 지을 때면 단장요의 도자기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아기자기한 도자기와 ‘덜 미안한 도구를 만들고 싶다’는 바램에서 강영준 작가의 소소한 배려가 느껴진다.

2020년 11월 19일. 한남동 산수화의 또 다른 공간 ‘낮이라 불리었던 밤: ◐밪’에서 단장요 강영준 작가의 이야기를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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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 공간이 거의 가득 참

Meta Container

저장 공간이 거의 가득 참

Storage Almost Full

김민수

Kim Minsoo


인터뷰. 김일다
사진. 홍철기

◐ 01. 작업의 시작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 천과의 인연과 천을 처음 잡았을 때는?

흙이라는 매체를 손에 익히면서부터 작업과 작업하는 직업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 같다. 지금은 직물을 주로 다루지만 그 소재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설계한 과정을 따라서 그대로 재현하고 반복 복제하는 손노동을 하기도 하지만 오롯이 개인으로 발화하는 작업은 순간마다 즉흥연주처럼 변주가 가능해서 숨통이 트인다.

직물은 사람이 갓 태어나자마자 피부로 감각하는 첫 인공물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생명체와 다르게 일생 동안 직물 공간에 감싸여 대부분의 시간을 산다. 한편 내 의지로 재료로써 천을 처음 ‘잡았다’ 할만한 일은 어렸을 때 놀이로 했던 바느질이었던 거 같다.

◐ 02. 천의 매력은 무엇인가? 수많은 소재 중에 천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점토 이후에 가장 많이 그리고 오래 다루어온 소재이다. 손에 익은 재료여서 조형의 재료로 친숙하다는 점도 있지만 직물만이 가진 맥락과 종류마다 다른 물성 있기 때문에 진행하는 작업에 부합하게 선별한 재료이기도 하다. 앞으로 사용하게 될 여러 재료 중 하나이다.

섬유는 당연하게도 환경과 기술, 산업의 역사와 함께 확장된 소재이다. 재료, 가공 방식, 용도, 질감 등 다양성을 갖는다. 주로 사용하는 직물은 소재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유동적이고, 납작하고, 입체가 될 수 있고, 주름지고, 일상적이다. 또 작은 천 조각은 혼자 기립하기 힘들다. 한편 유연하지만 굉장히 강한 물질이기도 하다. 점토와 직물 모두 유연한 재료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유연함이 있다.

◐ 03. 작가의 성격과 기질은 어떤가?

혼자 작업하기에 적합한 기질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 04. 어렸을 때 어떠한 성장기를 보냈는가?

80년에 준공된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냈다.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동과 동 사이에 공간이 넓었고 동선이 다양했다. 요새의 아파트와 달리 서로 다른 높이의 지반 위에 지어진 곳이라서 층위의 변화가 다양했다. 산책하고 자전거 타기에 재미있는 지형이었다. 풀만 심은 너른 잔디밭 같은 구역도 있었고 수종도 다양하고 큰 나무도 많았다. 아파트 단지 중심에 있는 두텁고 너른 모래밭 놀이터에는 우주 시대 영향을 받은 로켓 형상의 미끄럼틀이 있었고 파이프를 용접한 후 도색한 놀이기구들이 있었다. 아파트 창문 너머로 유성을 본 적이 있고, 어떤 여름밤에 느꼈던, 바람 한 점 없고 내 피부 온도와 바깥 기온에 차이가 없어서 우주에 떠 있는 것 같은 감각도 잊히지 않는다. 여름방학 때마다 동해에 갔고 어느 방학 때인가 해파리가 출몰하던 시점 이후부터 가지 않았다. 13살 즈음에 얼굴 한쪽에 마비가 온 적이 있었다. 완치된 지금은 오른쪽이었는지 왼쪽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살갗에 스쳐도 감각이 없고 어떤 표정을 지어도 반쪽만 지어진 시기가 있었다. 관찰하거나 손으로 만드는 활동을 좋아했다.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어도, 떠올리면 희미해도 자국처럼 남은 인상들이 있다.

◐ 05. 일상과 휴식은 어떻게 취하고 있는가?

생활인으로 제때 먹고 제때 자는 것의 중요함을 느낀 후로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힘들다. 때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찾아 읽고, 보고, 듣지도 않는) 휴식이 꼭 필요하다.

◐ 06. 이번 전시의 구상은 어떤 것이 있는가?

여전히 공간과 감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되었다. 기본 전제 조건은 기성 직물을 이용하는 것과 그것으로 공간을 보이는 것이다. 재료의 물성다움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동일하지만 continued container 이름으로 주로 선보이는 실용성을 가진 사물 만들기 활동과는 문제의식이나 접근 방식이 다르다. 다종다양한 개념의 공간을 관조하는 meta container 시리즈의 연장선이다. 좋든 싫든 스크린과 가까워지면서 개인적으로도 나타나는 감각의 변화가 분명 있음을 느낀다. 경험들이 넘쳐나지만 없는 것과도 같은 경험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방향으로 확대된 감각이 있는 반면 망실된 촉각성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전시에서 평면적이고 입체적인 것이 교차하고, 직물 외에도 작업과 연결고리를 가진 다른 매체의 작업도 함께 구성할 예정이다. 이번 작업은 어쩌면 전시 공간의 이름인 ‘밪(밤+낮)’과도 동떨어져 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07. 근래 관심 있는 요소 및 주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Covid-19로 야외에서의 후각과 촉각이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평평하고 매끄러운 스크린 감각에 익숙해진 시절이라 이전에도 빈약했지만 더욱 맡을 수도 닿을 수도 없게 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무리 차별과 경계를 지으려는 환경에도 모두 지구 안에 있다는 감각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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밪 이야기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공간

밪 이야기

2020. 2. -

인터뷰. 김일다

1. 밪◐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특별한 목적을 띄고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동기는 있었다. 이 이야기는 자연스레 산수화(山水和)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산수화는 2014년에 오픈했지만 茶는 아무런 의식 없이 어렸을 때부터 습관적으로 마시던 집안의 음료였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어머님과 함께 중국의 茶 재배지를 다니면서 단순한 음료수였던 茶를 더 이해하고 싶어졌다. 내 앞에 놓인 茶의 잎을, 종류를, 재배지를, 지역과 기후를. 그러다 보니 해가 거듭될수록 관심 폭은 넓어지고 차를 담는 다도구의 눈길은 자연스러운 연결이었다. 단순히 茶를 아름답게(美) 담아 내기 보다 다도구의 깊이와 두께, 크기와 흙이 맛(味)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茶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다도구는 어떤 특색이 있는지’를 여기저기 찾아가보니, 어느새 중국, 대만, 일본, 한국 등을 수시로 드나들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씩 마음에 들어 구매했던 다도구가 산수화 1층에 판매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 연유이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고, 작품도 많아 지면서 조금씩 아쉬움도 싹트기 시작했다. 그 지역과 작가들을 만나면서 들었던 이야기와 사람들. 그리고 茶를 담는 기능의 개성과 특성들이 집중되지 못하고 다소 덮어버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작가든, 한 주제든 내가 현지에서 느꼈던 마음과 감정을 조금이나마 전달하려면 몰입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 공간이 밪◐의 동기였다.

“밪은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공간”

2. 밪◐은 어떤 공간인가?

산수화 1층에서 판매하던 다도구를 보다 심층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밪◐이라는 공간의 동기지만 다도구에만 한정된 공간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갤러리, 문화공간으로 한정하기에는 닫힌 느낌이 있었다. 전시회도 하고, 판매도 하고, 팝업스토어도 하고, 장터도 하고, 강의도 하고, 사교의 공간도 되는 그때그때 내가 흥미롭게 할 수 있는 공간. 100원짜리를 할 수도 있고, 1억 짜리…는 못하겠지만 (웃음) .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공간’이 가장 밪◐다운 표현 같다. 공간의 정의는 느슨했지만 조명, 바닥, 벽, 장 등 기능적인 측면은 많이 고려했다.

“밪은 흥미가 이끌고, 흥미가 만들어 내는 공간”

3. 밪◐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낮으로 불린 밤 (the night we called it a day)’이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 표현이 참 좋았다. 우리의 날을 24시간, 일일, 하루, 낮과 밤 등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낮으로 불린 밤 혹은 밤으로 불린 낮은 뭔가 하루를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표현이란 그런 것이니깐. 그렇게 기억 저편에 남아 있던 터라, 이전부터 1층 산수화 내의 어둡고 밝은 공간을 직원들끼리는 ‘낮과밤’, ‘밤과낮’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그런 연유에서 밤과 낮을 합성한 밪◐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고 ◐은 이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기호로 쓰고 있다.

산수화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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